[삼천포 미술관] 신들의 사랑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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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 복수는 나의 것
헤라는 웬만한 여성들보다 현명할 뿐만 아니라 막대한 권력까지 쥔 여신인 만큼 복수에 실패한 경우는 거의 없다. 남편 제우스가 연애에 실패한 경우가 거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전편에 소개한 칼리스토 이야기에서와 같이 맹목적인 질투에 사로잡혀 상대방을 곰으로 만드는 식의 복수만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빼앗아간 여성에게 복수하기 위해 여러 가지 계략을 쓰기도 했다. 디오니소스의 어머니로 알려진 세멜레의 경우가 그러하다. 제우스가 세멜레를 자주 찾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헤라는 계책을 써서 그녀를 제거한다. '세멜레야, 제우스는 나랑 있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화끈한 모습으로 나타난단다~' 여신의 도발에 넘어간 세멜레는 제우스에게 자신과도 헤라와 있을 때의 모습으로 있어달라고 부탁한다. 제우스는 그녀의 간곡한 청에 따라 그의 본래 모습인 번개로 변했고 결국 세멜레는 불타죽었다. [The education of the Bacchus], 1630-35
당시 세멜레는 제우스의 아들 디오니소스(바쿠스)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세멜레가 죽자 제우스는 태아를 자신의 넓적다리에 넣어 달이 찰 때까지 키웠다. 질투로 질투를 이긴 이 계략은 헤라가 연애계의 손자에 해당하는 지략가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녀의 지략이 사랑을 획득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지키는 것에서 발휘된다는 점이다. 또한 사랑을 지키는 그녀의 방법은 불행을 방지하는 것이 아니다. 제우스가 벌려놓은 사태-불행-를 수습하는 것이다. 바로 복수를 통해서 말이다. 빛나는 권력과 매력으로 무장된 최고신의 유혹에 넘어갔을 뿐인 것이 죄라면 죄인 여성들. 이들은 자신이 지은 죄에 비해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르고 만다. 이쯤해서 우리는 불륜에 대한 헤라의 화살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 바로 여성, 즉 피해자를 향해서다. 따라서 이들은 이중의 피해자가 된다. '내 남편 제우스가 그리 된 것은 그년 때문이야.' 자신의 억압적인 과거를 며느리에게 전가하는 시어머니처럼, 남편과 통정한 미혼여성의 머리끄댕이를 붙잡는 아내처럼, 헤라는 '자신의 남자가 자신에게 잘못하게끔 만든' 여성을 증오한다. Correggio, [Jupiter and Io] 1531-32
다시 모든 사건의 원인인 제우스의 색정으로 돌아와 보자. 제우스의 연애사건 중 대미는 단연 '헤라의 여자'를 건드린 사건이다. 헤라에게 레즈비언 파트너가 있었다든지 그녀가 양성애자였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헤라의 직속 부하, 이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오는 헤라의 신전에 소속된 무녀였다. 그녀는 제우스의 눈에 들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당연히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오가 그 무서운 헤라의 치마폭에 있는 여자라는 것. 제우스는 나름대로 아내의 눈을 피하고자 하늘을 검은 구름으로 뒤덮은 채 이오와 관계했으나 이 사실을 헤라가 모를 리 없었다. (자신의 수하였는데 모를 리가 없잖은가!) 여튼 제우스에게 중요한 것은 소위 '부적절한 상대'와 오랫동안 비밀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한 번 ‘따먹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제우스로서는 딱 이오의 몸을 취하는데 성공할 정도만큼만 공을 들이면 되는 일이었다. 이후의 일이야 어찌 됐든 일단 마음에 드는 여자와 하늘을 보고 별을 따는 일이 중요했다. 제우스는 무책임했고 헤라는 집요했다. 제우스는 이오와의 연애현장을 헤라에게 급습당하고 만다. Pieter Pietersz Lastman [Juno Discovering Jupiter with Io] 1618
헤라가 나타났다. 제우스는 좃됐고, 이오는 소됐다. 갑자기 헤라가 나타나자 제우스는 순식간에 이오를 암소로 변신시켰다. 헤라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제우스에게 암소를 달라고 요구했다. '저 아름답고 탐스러운 암소를 내게 선물로 주세요.' 아름답고 탐스럽긴 커녕 사지를 찢어발길 씨발년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연적에게 복수하는 헤라는 공명에 필적하는 지략가였다. 제우스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으나 헤라는 집요하게 암소-이오를 요구했고 남편에게는 더이상 요청을 회피할 명분이 없었다. 결국 이오는 암소의 몸으로 헤라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다. 헤라는 거인 아르고스에게 암소-이오를 감시하게 했다. 아르고스는 100개의 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보통은 잘 때도 2개의 눈만 감고 잠을 잤다. 가여운 이오는 암소의 몸으로 철통같은 감시를 당하게 되었다. 여튼 제우스는 그의 충실한 전령 헤르메스에게 이오를 되찾아오라는 명을 내렸고 헤르메스는 피리소리로 아르고스를 완전히 잠들게 한 뒤에 목을 베어버렸다. 그러자 헤라는 암소-이오에게 무지개를 보내 뒤 쫒게 했고 그녀는 바다 너머 이집트까지 가게 되었다. 이 기구한 암소-이오가 건너간 바다를 ‘이오니아 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 이렇게 보면 이오의 운명은 기구하기 이를 데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녀의 인생은 꽤나 잘 풀렸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이집트의 왕과 결혼해 당시 가장 잘 나가는 왕국의 황후가 되었고, 이후로는 이집트에서 가장 숭배되는 존재 중 하나인 이시스 여신으로 추앙받았다고 한다. Peter Paul Rubens Juno and Argus] c.1611
헤라는 헤르메스에게 목이 잘린 아르고스의 눈알을 뽑아서 공작새에 장식했다. 공작새는 헤라 여신을 상징하는 새, 백 개의 눈알이 공작새의 빛나는 깃털이 되었다. 어쨌든... 아르고스는 요즘으로 치면 흥신소같은 역할을 하다가 목 잘린 경우. 쯧쯧 헤라의 삶에서 주인공은 누구? 헤라는 결코 좋은 어머니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어머니라는 역할보다 중요한 것은 남편에게 사랑받는 아내로서의 역할이었다. 애초에 ‘신들의 사랑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현모양처'라는 말에서 일단 '현모'를 빼고 보는 편이 낫다. 헤라와 같은 여성에게 아이들은 남편을 위한 선물이거나 아름다운 가정의 일부를 이루는 구성물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헤라는 헤파이스토스를 낳았을 때 아들이 그녀의 기대와 달리 불구의 추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를 과감하게 올림포스 산 아래로 던져버렸다.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나온 또 다른 아들 아레스를 대하는 태도도 다르지 않았다. 아레스는 전쟁의 수호신이지만 정의로운 전쟁과 도시의 수호여신 아테네와는 달리 분란을 일으키는 사고뭉치 난봉꾼이었다. 배다른 두 남매는 전쟁의 신이었으나 재능은 달랐다. 아테네는 모든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아레스는 성격만 터프했지 실력은 출중하지 못해서, 심심찮게 패하곤 했으며 심지어 전투에선 목이 잘리는 수모까지 겪었다. 제우스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식에게 헤라는 사랑을 나누어주지 않았다. 제우스를 남편으로 둔 헤라에게 그 어떤 자식도 남편보다 위대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녀는 자식들에게 큰 가치나 기대를 두지 않았을 것이다. 자식과의 관계만이 아니다. 헤라는 신화 속에서 어떤 다른 신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특히 여성과의 관계에서 그렇다. 헤라와 같은 여성에게 '여자의 적은 여자'다. (특히 내 남편을 빼앗아갈 가능성이 있는 매력적인 젊은 여성은 모두 나쁜 여자!) 헤라의 삶에서 제우스의 존재 외에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고, 헤라는 제우스 외의 누구와도 특별한 깊은 관계를 맺으려 들지 않았다. Rembrandt [Juno] 1664-65
렘브란트는 헤라 여신을 세속의 군주와 같은 모습으로 호화롭게 표현했다. 그러나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장신구를 걸치고 있을지라도 외로움은 가릴 수 없다. 헤라는 제우스와 얽혀있는 사건에서만 주인공 역할을 맡았으며, 실상 그녀는 한번도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는 셈이다. 그녀는 주인공인 순간에서도 사실은 엑스트라, 즉 제우스가 주인공인 이야기의 엑스트라였다. 이 말은 곧 그녀가 제우스로 상징되는 이기적인 남성성을 위한 들러리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노가미의 화신 헤라. 그러나 그녀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던 모노가미는 가부장적이다. 물론 헤라가 남성들이 여성들을 착취하기 위해 만들어낸 억압기제의 결정체이며, 헤라가 상징하는 것들이 타파의 대상이라는 주장을 할 생각은 없다. 본 칼럼에서 중요한 점은 헤라 여신이 상징하는 여성성에 대한 비판이나 거부가 아니다. 그녀를 통해 수많은 사랑법 중 현대 한국사회에서 가장 지배적인 사랑법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려는 것 뿐이다. 소유하는 사랑, 독점하는 삶 신화는 인간의 삶과 사회를 반영한다. 신화 속 헤라와 제우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사랑과 결혼에 대해 생각해보자. 현대 한국사회에서 가장 선호되는 결혼제도(또는 사랑법)는 서로에 대해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성적 권한을 가지고 있는 남자와 여자의 결합만을 인정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어쨌든 지금도 수많은 제우스가 그들의 헤라-아내 혹은 배우자-가 알게 모르게 바람을 피우고 있으며 수많은 헤라는 행복한 가정을 지켜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이것이 일반적인 경우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예외도 있다. 남성과 여성의 전통적인 성역할이 해체되면서 가정을 지키는 ‘남성-헤라’와 모노가미의 속박에서 일탈하려는 ‘여성-제우스’의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헤라 여신의 정신-모노가미-을 계승한 한국사회는 법제를 통해 (그리고 다수의 관습적인 인식과 평판을 통해) 제우스와 그의 파트너의 혼외정사를 단죄한다. 일부일처제도는 결혼제도의 변모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에 속하는 근대적인 결혼제도임에 분명하다. 인류학자들은 인류의 결혼형태가 모계혈통 중심(여성지배 사회와는 다르다)의 일처다부제에서 일부다처제로 변화했으며 근대에 들어 일부일처제도가 확립되어 왔다고 설명한다. 이보다 세분하여 난혼, 집단혼, 일처다부, 일부다처 등의 과정을 거친 뒤에 일부일처제를 이루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따르면 일부일처제는 한 남성과 한 여성을 가족의 기본 단위로 인정하는 가장 근대적인 - 발전한 형태로 현대사회에 최적화된 결혼제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앵겔스에 따르면 일부일처제는 남성이 여성의 성을 통제하여 상속자를 보호하고 재화를 보존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주장했으며,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마빈 해리스는 일부일처제가 여성의 성을 일종의 전리품으로 삼아 남성의 여성소유를 고착하는 제도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근대사회의 상식이나 모범으로 여겨지는 일부일처제의 실상은 그리 평등하지 않다는 말이다. 물론 서로의 (섹스를 포함한) 신체적 정신적 결정권을 양도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믿음에 새삼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없다. 모노가미가 인간의 생물학적 욕망을 억압하는 제도이든 실상은 성차별이 기저에 깔려있든 현실적으로 얼마나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든 간에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그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사랑으로 결속된 두 사람 모두가 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말이다. 어쨌든 다음 편에서는 신화 이야기에서 소유와 독점과는 다른 사랑법을 살펴보려고 한다. 모노가미가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억압하는 제도의 일부분이라는 점은 분명하고 모든 사회에서 그렇듯 억압적인 제도에는 그에 반하는 시도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스신화에는 헤라와 대척점에 있는 아프로디테가 공존하고 있다. 아프로디테는 폴리아모리(평등하고 개방적인 다자연애)의 화신으로서 현대의 마초적인 표현으로는 '걸레'나 다름없을 테지만 고대에는 헤라 이상으로 숭배되어온 여신이다. 게다가 이 정열적인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아름답고 섹시한데다 옷도 많이 입지 않는다, 다음편을 기대하시라! Alessandro Allori [Venus and Cupid]
참고 : 여신으로 상징되는 여성성의 원형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은 전적으로 '진 시노다 볼린의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 (도서출판 또 하나의 문화)을 참고했다. 그리고 이 책 정말 재미있다. 저자 : 남로당 예술진흥위원장 Marily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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