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사소한 것에만 목숨을 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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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쩨쩨한 로맨스> 누군가는 '사소함'을 '쪼잔함'이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디테일'이라고 한다. 쪼잔함이 되었건 디테일이 되었건 아무튼 사소한 것은 사소한 것이다. 단 그게 홀로 있을 때만 그렇다. 이 사소함 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태산을 들어 저리로 옮긴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의 사소함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또 다른 사소함들이 자석처럼 달라붙는다. 그래서 결국은 고개를 젓게 만든다. 이번에도 또 아닌가봐 하면서 말이다. 사실 큰일은 아니다. 너무 사소해서 나조차도 긴가민가할 정도. 하지만 그것들이 모이면 이른바 ‘정 떨어짐’ 이 되는 것이다. 정이 떨어지는 건 정말 사소함이 모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어제 본 사랑해, 파리 라는 영화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남편이 아내에게 너무나 정이 떨어져서 그만 헤어지자고 말하려고 한다. 그런데 정이 떨어진 이유가 다음과 같다. 고기 요리를 할 때면 늘 흥얼거리는 그 멜로디가 듣기 싫고, 버린다 버린다 하면서도 매번 입는 빨간 트렌치코트가 지겹고, 음식을 시킬 때 자기는 애피타이저도 디저트도 시키지 않으면서 내껄 다 빼앗아 먹어서 그렇다. 듣기 싫은 멜로디 좀 흥얼거리면 어떻고 버린다던 빨간 코드 아까워서 못 버리고 좀 입으면 어떤가. 그렇지만 이미 그게 싫어지기 시작하면 그 의미는 타인들이 부여하는 무게와는 다른. 어떤 절대적인 힘을 가지게 된다. ‘그’라기 보다는 ‘그들’이라고 해야 옳은지도 모르겠다. 내가 만난 남자들 중에서 상당수가 속해 있었으니까. 내가 지구상에서 부러 모으려고 해도 힘들만큼 괴상한 부류들만 만나고 다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가 만난 그들은 분명히 그랬다. 남자들은 자신의 성기가 가려우면 참지 않는다. 물론 공공장소에서 안 참는 건 아니다. 그러면 대번 변태성욕자로 찍혀서 파출소 신세를 지게 될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은 여자 친구. 그것도 섹스를 함께 한 여자 친구 앞에서는 참지 않는다는 것이다. 손을 넣어서 벅벅 긁건 아니면 옷 위에 손을 대고 비비적거리건 어쨌건 그들은 그 가려움을 해결한다. 그것도 여자 친구의 눈앞에서 말이다. 반대로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 여자들도 물론 성기가 가려울 때가 있다. 신체의 일부이니 그게 왜 가려울 일이 전혀 없겠는가 하다못해 등짝 같은 경우는 사흘에 한번은 가려운데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절대로 남자 앞에서 거길 긁지 못한다. 거의 대부분은 남자의 시야에서 벗어난 곳에서 해결을 보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적어도 주의를 다른 곳으로 끈 다음 슬쩍(?) 해 치운다. 들키고 안 들키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일종의 배려이자 나 자신에 대한 문제이다. 내 앞에서 버젓이 팬티에 손을 넣어 성기를 긁어대는 그. 가려운 게 지저분해 보인다는 소리가 아니다. 가려울 수 있다. 충분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어째서 조금도, 약간도 가릴 생각을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어릴 때 코딱지 팔 때도 그렇게 당당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약간의 부끄러움조차 없는 그를 보면 정말이지 우리 사이는 이제 서로 똥 싸는 모습을 지켜 볼 일만 남았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이럴 때 여자들은 대부분 모른척한다. 애써 못 본 척하고 봐도 심각하지 않은척한다. ‘가려우면 나가서 팬티 내리고 화끈하게 제대로 벅벅 좀 긁던가’ 라고 말할 때는 이미 헤어지고 난 이후에나 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 앞임에도 불구하고 성기가 가렵다고 해서 손을 넣어 벅벅 긁었다'라는 이유만으로 헤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머리 속에는 분명하게 각인이 되어버린다. '그는 성기가 가려울 때 숨기려고 하지 않고 내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벅벅벅 긁었다'라고 말이다. 저 단어 중에서 가장 싫은 건 ‘아무생각 없이’ 이다. 내 음식을 먹을 때면 나에게 제발 허락을 좀 받았으면 좋겠다. 내 접시에 담긴 음식은 어찌 되었거나 나의 몫이다. 그의 접시에 담긴 음식이 그의 몫이듯 말이다. 무릇 남의 몫을 조금 취하고 싶으면 ‘말’ 이라도 하는 게 예의 아닌가? 나 한입만 먹어도 돼? 혹은 이거 맛 좀 볼게 가 그렇게 어려운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 나는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는데 그의 숟가락은 내 몫의 접시 위에서 내 음식을 탐하느라 정신없는 모습을 볼 때면 그만 엄연한 내 몫의 음식을 포기하고 싶어진다. 워낙 찌개그릇 하나 놓고 아빠도 숟가락을 담그고 아들도 담그고 엄마도 담그는 문화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건 가족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섹스할때는 내 입속의 초컬렛마저 그의 입속으로 넘어갈 수 있다 해도 평상시에 밥을 먹을 때면 달라야하는거 아닌가? 더구나 나도 배가 고파 죽겠는데 내 음식에 숟가락질 하는 횟수가 3회를 넘으면 화가 난다. 그렇다고 해서 ‘니꺼만 좀 드실래요?’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차라리 내 기분이 좀 찝찝하고 말지 그의 기분까지 상하게 할 건 없잖아 라고 생각하는 건. 내가 배려심이 많은 인간이여서인지 아니면 귀찮아여서인지 구분은 잘 안가지만 말이다. 섹스를 하고 난 이후 너무나 노골적으로 피곤해하는 그를 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비참하다. 마치 나만 좋아서, 오직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이 그 힘겨운 노동을 견뎌냈다는 듯 한 분위기는 정말이지 참기 힘들다. 난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두 번은 못하겠어’ 라는 멘트까지 날려주면 정말이지 난감하다. 우리가 언제는 두 번씩 했냐고, 늘 한번으로 만족하고 함께 손을 잡고 잘 잤었는데 왜 마누라 샤워소리 두려워하듯 그러냐고 말하고 싶지만 역시나 아서라 말아라가 되어버린다. 내 친구는 그런 말을 했다. 센스 있고 감각 있고 유머러스하고 자상하면 다 게이더라고. 요즘 트렌드세터들은 게이 친구를 하나씩 두는 게 유행이라고 한다. 참 살다 살다 별 유행이 다 있다 싶다가도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가 남자에게 바라는 그 모든 사소함, 디테일을 그들은 갖추고 있을 테니까. 굳이 차 문을 열어주는 매너 같은 건 없어도 된다. 레스토랑에서 의자를 뒤로 빼 주지 않아도 괜찮다. 기념일마다 장미꽃을 안기지 않아도 된다. 비가 오는 날 짠 하고 나타나서 노란색 우산을 씌워주지 않아도 된다. 정말 비싼 뮤지컬 티켓을, 그것도 로얄석으로 끊어서는 나를 놀라게 하지 않아도 좋다. 그냥 내가 싫어하는 것. 아니 처음 연애할 때 조심했던 것들이라면 나중에까지도 조심해줄수는 없을까? 방귀를 끼는 건 어쩔 수 없다 치지만 제발 손으로 총 모양을 하고 나를 향해 발사하지는 말았으면 하는 내가 까탈스러운건가? 그렇게 깜찍하게 넘어가기엔 자신의 방귀 냄새가 화생방전을 방불케 한다는 사실을 정말이지 모르는 걸까? 사랑을 하고 오랜 시간을 같이 있다가 보면 서로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도 다 들키게 된다. 그렇지만 최소한 숨기려고 애썼어라는 느낌 정도만 준다면 나는 멀쩡히 봤던 것도 못 본척 해 줄 수 있고 냄새가 진동을 한다 하더라도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듯 능청을 떨어줄 수 있다. 이런 것이 두려워 남자를 못 사귀는건 아니지만 이런 게 모여서 정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글쓴이ㅣ남로당 칼럼니스트 블루버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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