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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해보다 오는 해가 더 무서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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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블루 발렌타인> 2015년 달력도 달랑 한 장 남았다. 커피 한잔을 마시며 가는 해를 가만히 정리하며 앞으로 다가올 새 해를 희망차게 준비... 하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많구나. 어릴 때는 그랬다. (여기서 어릴 때란 20대를 말 하는 것이다.) 문구사로 달려가서는 마지막 남은 달력 대신 예쁘고 귀여운 탁상 달력을 고르고 새로운 다이어리를 사면 다가오는 내 새해에 무언가 대단하고도 희망찬 일이 막 펼쳐질 것 같았었다. 물론 얼마 남지 않은 해에 대한 반성 또한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 반성은 ‘내년에는 안 그래야지’ 혹은 ‘내년에는 꼭 해야지’ 등등 매우 건전한 방향으로 끝을 맺었더랬다.
그러나 지금은 솔직히 말하자면 ‘무섭다’ 이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 달력은 어디 은행이나 잡지사 같은 곳에서 굴러들어오는걸 적당히 쓰면 되고, 다이어리는 몇 해째 속지만 바꿀 뿐이다. 다가올 희망찬 새해 같은 건 없다는 건 애 진작에 깨달았으며 (해가 바뀐다고 해서 인간이 바뀌는 건 아니지 암만) 해 넘기자마자 바로 시작될 ‘너 정말로 그렇게 늙어 죽을 셈이냐’ 로 시작되는 잔소리 퍼레이드가 기다리는 설날 같은 건 좀 건너뛰었으면 좋겠다. 얼마 전 모임에 참석을 했었다. 남자들만 왕창 모여 있는, 따라서 이 나이에도 홍일점이라는 이유만으로 친절과 관심을 기대할 수 있는 그런 모임이었다. (내가 거기 낀 이유는 순전히 여성의 몸에 깃든 남성의 영혼과 아무리 퍼 넣어도 새벽녘에 5차를 외칠 수 있는 위장 덕분이다.) 처음에는 친한 친구 몇 명이서 시작된 모임이었는데 얘가 쟤를 불러내는 식으로 하나 둘씩 숫자가 늘어나더니 이제는 모임 때마다 제법 뉴페이스들도 등장하는 모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뉴페이스들은 그 모임에서 유일한 여성인 내 나이를 맞추는 것으로 신고식을 하게 되었다. 몇몇 뉴 페이스들은 제법 예리한 눈을 번뜩이며 내 나이를 귀신같이 맞추었지만 나이가 좀 어린 축들은 내가 애써 짓고 있는 ‘난 아~무 것도 몰라요’ 눈빛에 홀린 나머지 고맙게도 이십 대 중 후반 언저리의 나이를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당연한 일이지만 은행잔고고 뭐고 간에 ‘2차는 내가 쏜다’고 호기롭게 외치곤 했었다. 물론 다음날이면 쓰린 속과 함께 전날 긁은 카드 값에 평상시보다 3.6배 정도는 골이 딩딩거렸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 나이가 되면 단 한 살이라도 어리게 봐주는 사람들은 무조건 고맙고,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싶어 흐뭇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얼마 전의 모임에서는 어떤 뉴 페이스도 내 나이를 20대 끝자락으로라도 봐 주지 않았다. 다들 ‘서른은 훨 넘긴 것 같은데 정확하게는 잘...’ 뭐 이런 반응들이었다. 게다가 한 놈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요즘 들어 부쩍 불기 시작해서 안 그래도 신경 쓰여 죽겠는 내 몸무게까지 정확하게 맞추는 기염을 토했다. 나는 친한 친구에게 전화로 신세 한탄을 했다. 이제 나는 죽었다 다시 깨어나지 않는 한 20대로 보일 일 따위는 없다며, 게다가 20대 때는 먹어도 먹어도 찌질 않아서 별명이 쓰레기통이었던 내가 허리둘레를 고민하는 게 웬 말이냐며, 그러자 그녀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야, 우리 나이에는 어려 보이려고 발악하면 그게 더 웃겨.” 그래 그렇겠지. 국으로 가만이나 있으면 중간 점수라도 받을 텐데 어려 보이겠답시고 어울리지도 않은 순진무구한 표정 따위를 짓거나 하는 건 오히려 추해 보이겠지. 그래서 나는 며칠 전 큰 맘 먹고 피부과 문을 두드렸다. 두드러기 같은 게 나지 않는 이상 피부과는 나와는 먼 세상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다 싶었다. 이 나이에 어려 보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비결은 어울리지도 않는 옷차림도 긴 생머리를 휘날리는 것도 아닌 바로 피부가 아니겠는가. 어느 순간부터 웃으면 잔주름이 자글자글 하고 볼때기 피부는 거북이 등껍질이 부럽잖은 것을 애써 외면했지만 이제 모른 척 하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거금을 투자하여 그들이 권하는 (그리하여 아기 피부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관리와 레이저 시술을 끊었다. 물론 그렇게 하는 데는 지난번에 들어온 인세의 절반이 고스란히 투자되었지만 눈 딱 감고 저질렀다. 거의 자각도 하지 못하고 살았는데 어느 날 내 방송을 모니터 해 보니 목소리도 늙어 있었다. 착각인가? 착각일거야? 착각이겠지 하면서 20대 때 방송했던 녹음테이프를 들어보니 아... 거기에는 너무도 어린 목소리의 내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내 목소리는 누구나 높임말이 절로 나올 만큼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것이다. 그래, 생각해보면 나이가 들어 좋은 점도 많다. 조금은 현명해졌고 (믿자) 조금은 덜 불안한 인생을 꾸려나가게 되었고 (믿을래) 무엇보다 20대 때에는 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가끔은 다시 20대로 돌아가 그 질풍노도의 시기를 온 몸으로 겪을 생각을 하면 끔찍하기도 하다. 그래서 누가 리셋 버튼을 누를 기회를 준다 하더라도 그 치열하다 못해 지랄 같던 시기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자꾸만 그때를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요즘 내 친구들과 나의 소원은 솜털 보송보송한 스물 한 두 살짜리 남자 아이들과 술 한 잔 마셔보고 싶다는 것이다. 사귀고 싶다거나 자고 싶은 것도 아닌 술 한 잔이라니... 정말 쓰고 나니 구차해 미치겠다. 그렇지만 제일 무서운 것은 내가 조금씩 더 겁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이제 철이 약간은 드는지 세상 무서운 줄 알겠다는 것이다. 젊어지고 싶다는 욕망, 어려 보이고 싶다는 바람보다 더 무서운 건 그런 것이다. 늦은 밤이건 새벽이건 간에 엉망으로 취한 채 아무 생각 없이 타던 택시들을 타기가 이제는 겁이 난다. 아파트로 들어서는 입구에 시커먼 남자라도 따라오면 이러다 어디 끌려가서 죽도록 맞고 그 다음에는? 하는 생각에 머리털이 선다. 자꾸만 용기가 없어지고, 두려운 것들은 점점 더 많아진다. 삶은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 해도 결코 쉬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예전과 같은 열정이나 체력이 더는 내게 없음을 느낀다. TV에서 주구장창 광고해대는 의료보험 같은 것에 관심이 가고, 어디 조금만 아파도 머릿속에는 온갖 큰 병들이 다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더 이상은 꿈꾸지 않는 내가 두렵다. 무언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또 무언가 새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미 늦었다는 생각, 예전에 무엇 무엇을 했더라면 지금쯤은 달라져 있지 않을까 하는 후회들. 그러나 나는 잘 알고 있다. 다시 돌아간다 아마 지금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나는 복 받은 인간이다. 무엇보다 별 탈 없이 2015년을 보냈고, 다가올 2016년에도 나는 여전히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알던 사람들은 앞으로도 내 옆에 남아 있을 것이고 나 또한 그들의 곁에 있을 것이다. 숫자가 달라진다고 해서 내가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새로운 마음을 먹을 수는 있을 것이다. 잘 될 거라고, 넘어지지 않고 조금씩이지만 꾸준하게 이 길을 걸을 수 있을 거라고 나를 다독여본다. 그래 2015년. 나쁘지 않았다. 다만 2016년에는 좀 더 즐거운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더 이상 가는 해보다 오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도록. 그러기 위해서는 나이에 걸맞지는 않겠지만 약간의 모험심도 필요할 것이다. 가지 않은 길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나이를 먹는 게 그렇게 나쁜 일 만은 아닐 것이다. 글쓴이ㅣ남로당 칼럼니스트 블루버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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