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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정담] L의 이야기 - 쓸쓸해보였던 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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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카운트다운]

대구. 내 유년 시절의 추억이 강하게 자리 잡은 곳. 몇 년 전이었던가.. 나는 그 때 추억을 붙들기 위해 대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여자 혼자 하는 여행의 스릴을 느끼며, 대전을 거쳐 대구까지 들르던 그 여정을 '추억 찾기'라 명명했었다. 그리고 내가 발견할 흔적들에 무척 가슴 설레여 하며 대구땅을 늦은 저녁에 밟았다. 그러다 난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기형도 산문집의 광주행 여정을 읽으며, 문득 그 남자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왠지 모를 미안함. 그가 나에게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었으며, 나 역시 그에게 미안할만한 행동을 직접 한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 새벽, 난 그 남자를 '미안함'으로 떠올린다. 그리고 이렇게 그에 대해 추억한다.
 
1

내가 그를 만난 곳은 대구에 도착한 다음날 오전, '두류 공원'의 입구 앞에서였다. 며칠에 걸친 여행 끝에 피로해진 몸이었던데다가, 여자 혼자 낯선 도시의 모텔에서 잘 때 느끼는 긴장감으로 인해 신경이 다소 날카로와져 있지 않았었나 싶다.

새벽 일찍 모텔을 나섰었다. 아침 일찍 전에 살았던 동네를 찾아 갔고, 너무나 좁아져버린 어린 시절 뛰놀던 골목길을 바라보며 당황해 했다. 다소 씁쓸한 기분으로 시내에 나왔고 그때 당시엔 무척이나 커 보였던 공원에서 반나절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날씨는 찌는 듯 더웠다. 피로함과 허탈함을 애써 참으며 멍하게 앉아 잔디만 뜯다가 일어섰다. 대구 사는 남자 후배에게 전화를 했고 저녁 때 만날 약속을 잡아 버렸다. 남은 오후를 어떻게 보내야 하나 망망한 기분으로 공원 입구를 나섰다.
 
2 

수성못에 가는 길을 물으려 지나는 한 남자를 붙들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어딘가 비굴해 보이는 인상을 지닌 그가 날 잠시 훑어 보았다. 그리고, 잠시동안 그곳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먼가를 강조하던 그가 직접 태워주겠다며 나를 이끌었다. 지나친 호의가 아닌가 싶어 순간 경계심이 들긴 했지만, 대낮인데다가 그다지 사악해 보이지는 않은 외모에 그냥 지친 몸을 싣는 신세를 지기로 마음 먹었다.

그의 하얀색 프라이드에 몸을 싣고 수성못으로 가는 길에 난 그냥 히치하이커로서의 고마움 정도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연못에 도착한 뒤 그가 계속 내 옆에 붙어 있으려 하는 걸 알았을 때부터,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 대한 나의 불쾌감은 점점 무게를 더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자판기를 팔고 다니는 세일즈맨이라고 소개한, 그 쥐를 닮은 남자는 도에 지나친 친근함으로 나를 대했다. 전날 밤에 당했던 당황스럽던 일에 강한 호기심을 느끼며 꼬치꼬치 캐묻기도 하고, 내가 학생이란걸 밝혔을 때엔 노골적인 자기 비하에 빠지는 등 그의 과장된 친근함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대구 총각들이랑 자본적 있습니까~'

' ...... '

'나 같이 별볼일 없는 놈들한테야 그럴 일 없으시겠지만 같은 대학생들끼리는 잘 통할거 같은데요~ '

' .............. '

억지로 대꾸 해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 순간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이자가 나를 혼자 놔두고 떠나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이 사겠다며 간이 주점으로 끌고 가서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기도 하고, 더 이상 돌아다닐 곳이 없어진 뒤에는 일부러 경북대까지 데리고 가며 구경시켜 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젠 됐다며 혼자 돌아다니겠다는 내 말을 형식적인 사양으로 들었던 것인지, 아니면 내 기분을 눈치 챘으면서도 억지로 같이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선 아직도 잘 모르겠다.
 
3 

그가 불쾌하게 느껴졌던 한 이유는 그의 천박함에서 비롯 되었다. 경북대에서 마주친 남자 대학생에게 괜히 시비 걸며 욕설을 퍼붓기도 하고, 공원에서 여자들의 무리를 발견하고는 노골적인 농담을 막무가내로 건넸다. 그럴 때마다 난 자리를 피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끼곤 했던 것이다. 다시 근처 공원으로 자리를 옮긴 뒤부터 그는 한참 동안 자신의 살아온 길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어느 한구절 이제 기억 나는 부분이 없지만, 자신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으며, 별볼일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었던 듯하다.

어쨌거나 호감으로 나를 대하는 그를 놔두고 자리를 박차기엔 그에겐 왠지 안쓰러운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냉정을 떨기엔 나는 당시 너무 어린 여자애였던거 같다. 다만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그 순간 내가 할수 있는 고작이었다. 지겹던 시간이 마침내 지나가서 약속 시간이 다가 왔을 때야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작별을 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자신이 시내까지 태워주겠다며 나를 이끌었고, 난 다시 그를 따라 가야했다. 공원부터 시내까지는 꽤 먼거리였다. 그의 차가 아니었으면 약속시간에 늦을 만큼 내 예상보다 한참을 가는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달리는 차 안에서 그는 나에게 만날 대상에 대해 남자 친구냐고 물었고, 난 그냥 과후배라고 알려 주었다. 그는 곧 이어 그 후배에 대한 천박한 농담, 상상을 늘어 놓았고, 난 울컥 화까지 치밀어 올랐다.

시내에 도착해서 내릴 때쯤 갑자기 그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내가 같이 어울리자고 말해 주길 그가 원한다는 것은 이미 그의 표정에서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었지만 난 무시했다. 고맙다는 형식적인 인사를 하며 그의 차에서 내렸을 때 그가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내가 내리자마자 그 명함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를 잊었다.
 
4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부터 지금까지.. 이 남자를 떠올린 기억이 없다. 그는 내가 새삼 떠올릴만큼이나 중요하게 불쾌했던 사람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후의 바쁜 일상들에 치여 여행을 추억할 기회가 없었던 탓도 있다.

하지만 오늘 새벽, 갑작스레 그의 마지막 작별 인사 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에 떠올랐던 미묘한 표정,느낌.. 그 불쾌하던 순간에도 난 그의 얼굴에서 떠오른 미묘한 이미지에 강한 인상을 받았었다. 그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여행을 마친 뒤 한참 지나서였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난 그 얼굴의 의미를 깨닫고 있다...

그는 외로왔던 것이다...
 
5 

생전 처음 보는 여자였지만 무엇이던 지껄이고 싶었고, 같이 있고 싶었던 것이다. 옆에 아무도 없이 혼자 떨어져 보내는 하루에 그는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지긋지긋한 일상, 삶에 지쳐 잠시 도망가고 싶었던 것이다. 꼭 그 대상이 나여야만, 여자여야만 했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단지 자신과 같이 있어 주고,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체온을 가진 그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내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원했고, 자신에게 따뜻한 관심을 가져주길 원했다. 과장된 비하로 자신에게 동정을 느껴주길 원했고, 일부러 한 천박한 행동으로 내가 웃음 짓길 바랬던 것이다. 최종적으로 그가 원한건 서울에서 내려온 여대생과의 섹스였을지도 모르지만, 본질적으로 원했던 것은 바로 교감이라 부를만한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을까.

헤어지던 그 순간 그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참담함과 비슷한 그 무엇이었다. 아무것도 나누지 못했다는 당혹감, 그리고 이제 다시 혼자가 되어야 한다는 두려움. 난 그의 외로움을 짓밟고 뒤돌아 섰다. 어쨌거나 그가 나에게 보여준 것은 호감이었는데 난 그를 더욱 외롭게 만들고 떠나 버렸다.

그래서 그것을 깨달은 난 지금 이렇게 그를 '미안함'이란 이름으로 추억하게 되는 것이다.
 
6

내가 지금 느낀 것들을 그 자리에서 느꼈다 해서, 과연 어떤 식으로 다르게 행동 했을까 하는 것은 대답 할 수 없다. 최소한 그를 더욱 외롭게 만들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하지만, 그건 자신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인간이란, 알면서도 타인의 감정을 짓밟는데 익숙한 존재니까 말이다.

그는 서울로 올라오고 싶다고 얘기 했었다. 시골에서 태어나 근근히 살아가고 있던 그에게, 대구라는 대도시가 어떤 굴레였을지는 짐작 할만 하다. 그에게 있어 서울에서 온 여대생이란, 하나의 이상적인 환타지로서의 해방구였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문득 의아해졌다. 난 왜 몇 년이나 지난 스쳐 지나갔던 남자의 얼굴에 대해 문득 떠올렸을까? 그리고 여태껏 생각 못해본 것을 오늘, 이 새벽에서야 깨달았을까. 그것에 대해 궁금해하던 나는 술에 취해 거울을 보다가 대답을 발견했다.

그리고 어떤 느낌에 대해서는 인간은 다들 비슷한 표정을 짓게 되는건가보다, 라며 쥐를 닮았던 남자의 나이가 된 나는 중얼 거리고 있었다.
남로당
대략 2001년 무렵 딴지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잉태.출산된 남녀불꽃로동당
http://burur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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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콜 2017-01-19 15:53:41
좋은것만 간직하여 추억으로 반추하려는게 일반적인 심리인데, 불쾌했던 기억도 이렇게도 많은걸 되새길수 있네요. 저도 그런 사람이 있었나 생각해보다가,
혹시 나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를 그분에게~~
따뜻한햇살 2016-12-28 05:24:13
씁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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