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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정담] I의 이야기 - 기억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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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I가 대학시절, 어느 여학생을 알게 된 시점에서부터 시작 된다. 그리고 이 처음은 그 후 아주 길고 오래 끄는 이야기의 자그마한 시작일 뿐이다. 그는 이 이야기를 어떤 노트에 적기 시작했는 데, 그 겉표지에는 아직 제목이 붙어 있지 않다.

어쨌든, 오프닝. 페이드 인.


1

다양한 과의 다양한 학생으로 이루어진 교양과목 수업 첫날. 강의가 막 시작 되려 할 때 한 여학생이 뒤늦게 들어왔다. 그녀가 들어오는 순간 강의실엔 생기로운 공기들로 가득차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나 인상적이었던 그 등장에 대해 어떻게 묘사하면 좋을까? 당시 나는 일기장에 그녀에 대해 이 여덟 글자의 단어를 괄호치고 적어 넣었다.

'패.션.과.잉.절.세.미.녀.'

강의실에 인사하며 들어온 그녀는 두리번 거리다가 나의 바로 앞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리고 첫날 앉은 자리는 관습적으로 강의가 끝날 때까지 고정 되었다.약 넉달의 시간동안 그녀는 매번 내 앞에 앉아서 수업을 들었다는 얘기이다. 소심한 나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도 같은 강의를 듣는 남학생들에게 질투와 분노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며 마음 불편해 했었다.
 
그녀에 대해 조금 더 묘사해보자. 앞서 말했듯이 그녀는 '과잉스러운' 패션감각의 소유자였다. 눈 오는 날엔 하얀 치마에 하얀 밍크코트를 입고 빨간 모자로 포인트를 주고 온다던가 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청바지에 까만 코트를 입고 다니는 나와는 너무나 다른 종류의 타입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특히 빛나게 한 것은 그 미모나 패션감각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진 인간들 특유의 그 생기발랄함. 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환하고 호탕한 웃음. 그녀가 옆자리의 여학생과 깔깔거리며 떠드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자면 나도 덩달아서 즐거워지곤 했다.
 
하지만 내성적이고 사람 사귀는 일에 익숙치 않은 종류의 인간인 나는, 넉달 내내 앞자리에 앉은 그녀에게 말 한번 걸어본 적이 없었다. 다만 아침에 그녀의 샴푸 향기 나는 뒷자리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하루하루의 즐거움이었을뿐. 그 일주일에 겨우 두번 있던 수업을 매일 기다리며 한학기를 보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나는 그녀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넉달간의 수업이 거의 끝나가던 무렵,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역에서 나는 그녀와 우연찮게 동행하게 되었다. 그녀는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넸고 나는 당황스러워하며 우물쭈물 인사를 받았다. 활달한 그녀는 내가 먼저 내릴 때까지 이런 저런 화제를 꺼내며 대화를 이끌어가 주었다. 그것이 넉달동안 그녀와 나눈 유일한 대화였다. 그리고 바로 수업이 끝났다. 그러나 그날 그녀와의 그 대화는 이미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오래오래 남게 되었다.

그 후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면 이 일은 누구나가 한번쯤은 겪는 풋풋한 추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글을 쓰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2

그러나 불행히도 그로부터 5년쯤 뒤, 더 정확히는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했고, 조그마한 컴퓨터 회사에 취직했고,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졌고, 부모님들이 일년 간격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마저 묻고 오던 날, 나는 울지 않기 위해 주먹 쥔 손을 악물었다. 그 밤에 나에게 남겨진 것은 슬픔만이 아니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았고 그것은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애초에 내성적이던 나에게 유일한 가족이었던 부모님들의 죽음은 아주 깊은 고립감을 남겨주었다.
 
혼자 생존해 나가는 생활이 시작되면서 나는 점점 더 움츠러 들었다. 한동안은 웃는다는 게 불편해서 사람 만나는걸 굳이 피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자체가 나의 일부분이 되어 버렸다. 결국 몇 안되던 친구들과의 연락도 끊겼다. 나는 단지 아침 6시에 눈을 떠 출근을 하고, 일이 끝나면 서점에 들러 책 한권을 사고, 집에 돌아와 맥주 한잔 마시며 책을 읽다가 잠드는 생활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나마 회사를 그만두지 않은 것은 컴퓨터를 만지는 일이라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처음엔 말을 붙여 보려 다가왔던 사람들도 나의 이 우울함을 엿보고 나서는 알아서 피해주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언제부턴가 나는 철저한 혼자가 되어 있었다. 세상은 실체감 없이 나의 주변을 맴돌았으며 나는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이 허구라는 환상에 문득문득 빠져들기 시작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더욱 괴로워졌다.

고립감과 비현실감에 뼈 속 깊이 지쳐가던 나는, 결국 모든 것을 정리하고 지구 반대쪽 남미로 여행을 떠나기로 자포자기하듯 결심했다. 그리고 차곡차곡 떠날 준비를 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던 중이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이런 날들의 한가운데서였다.
 
3

그 재회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을까. 그 밤에 갑자기 숨이 막힌 내가 평소엔 가지도 않던 놀이터로 발길을 옮겼고, 아무 이유 없이 그녀와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고, 그때 그녀가 그 놀이터의 그네 위에 쓰러지듯 앉아 있던 그 밤을 누구에게 납득 시킬 수 있을까. 나조차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인연의 장난들. 결국 설명하기를 포기한 나는 그냥 운명처럼 재회하게 되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어진다.
 
그녀는 창백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고 당연하게도(혹은 불행히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하는 게 아닐까 순간적으로 망설이던 나는,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소독약 냄새 나는 차가운 공간이 아닐 거라는 이유 없는 확신이 들었다. 밤공기에 실린 그녀의 병원 냄새 섞인 체취가 나의 이런 느낌을 불러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결국 결정을 내린 나는 그녀를 나의 집으로 안고 돌아왔다. 그녀는 밤새 고열에 시달렸고 나는 꼬박 그녀의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 보았다. 그리고 새벽녘쯤에 그녀가 더 이상 떨지 않음을 확인하고서야 벽에 기댄 채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밤새의 일을 다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어쩌면 자신에게 일어난 일마저도 호기심을 갖지 않게 되어 버린지도 모르지만. 여튼 그녀는 내가 누구냐는 질문마저도 하지 않았고, 그 점은 나를 조금 서운하게 했다.

꼬박 하루를 우린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은 채 나의 방에서 보냈다. 그녀는 가만히 누워서 천정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 옆에서 책을 읽었다. 그녀는 아무 얘기도 하고 싶지 않은듯 했고 나 역시도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없었다. 단 한마디의 비효율성도 용납하지 않는 우리의 분위기는 조심스러움이었지만 그것은 차라리 달콤하기까지도 한 침묵을 가져다 주었다. 그녀에게 따뜻한 죽을 건네 주었을 때 보여준 고마움이 담긴 미소 한번이면 나는 모든 게 충분했던 것이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셋째날, 사실 나는 굳이 출근할 필요가 없었다. 회사에는 이미 전화를 해둔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가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리를 피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출근하기 전에 나는 그녀에게 냉장고 안과, 혹시나 필요할지도 모르는 물건들의 배치에 대해 이것저것 자세하게 알려 주었다. 그녀는 나의 설명에 흥미를 표현했고 나는 그런 그녀의 반응이 조금은 놀라왔다. 문을 닫을 때 나를 배웅하는 그녀의 표정에는 예전의 생기가 되살아나고 있는듯이 보였는데, 그런 모습에 나는 내가 예상할 수 없는 어떤 사태에 대한 예감을 느끼며 집을 나섰다.

회사에 출근한 건 그런 의미에선 실수였다. 나는 하루종일 그녀가 가버리고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만 했던 것이다. 안절부절하다 못해 집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 아무 응답 없는 전화기에 결국 절망해 버렸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상실감이 나를 덮쳤고, 퇴근 후에 혼자 밤길을 돌아다니다가 힘없이 집으로 향했다.
 
4

그러나 문을 열었을 때, 놀랍게도 나를 맞이한 것은 앞치마를 두룬 그녀의 환한 웃음이었다. 그녀는 나를 위해 장을 보고 저녁 식사를 마련한 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왜 이렇게 늦었냐'는 그녀의 투정에 나는 당황해하며 엉거주춤 식탁에 앉았다. 완벽하게 예전으로 돌아간 그녀의 생기발랄한 모습 속에서 나는 그 순간, 그녀가 한편의 연극을 제안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와 내가 주연인 '평범한 신혼부부'라는 연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남편의 역을 맡으면서 오래전에 잊어 버렸던 따뜻한 무언가가 밑바닥에서 피어오름을 나는 느꼈다.
 
신혼부부로서의 생활이 시작 된지 사흘 째 되던 금요일 저녁, 서둘러 퇴근을 마친 나는 과일과 와인을 사들고 바삐 집으로 향했다. 그녀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정갈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우린 둘만의 주말 파티를 열었다. 나의 작은 방에 낡은 LP에서 흘러나오는 죽은 자들의 음악이 가득 차올랐고, 나와 그녀는 분위기와 술에 조금씩 젖어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베르디에 건배를 했고 냇킹콜에 끌어안고 춤을 췄으며 딥퍼플을 목청껏 따라 불렀다. 그리고는 마침내 짐 모리슨에 키스를 나누었다.. 나는 이 순간들이 영원하기를 나의 모든 것을 바쳐 갈망했다.
 
더 이상 새로 틀 LP가 없어졌을 때쯤 우리도 취해 있었다. 어둠속의 적막은 고요했고, 우린 서로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갑자기 나지막하지만 즐거운 목소리로 자신의 다섯 살때의 추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얘기가 끝나자 나는 초등학교 입학하던 날 벌어졌던 우스꽝스러운 실수담을 들려 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얘기는 마치 경쟁을 벌이듯 끊임 없이 이어져 나갔다. 그녀는 중학교 2학년 때의 초경과, 고3 때 대학생 오빠와의 첫키스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는 중삼 때의 첫몽정과, 교회 누나에게 보냈던 첫 연애편지에 대해 고백했다. 우린 끊임 없이 떠들었으며 미친듯이 웃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나는, 대학생 때 같이 수업을 들었던 잘 알지 못하는 한 여학생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녀가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했었는지, 그녀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마지막으로 나눈 그 30분의 잡담을 몇 년째 얼마나 자세히 기억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웃음을 거두고 내 얘기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듣고 있었다.

우리의 대화는 나의 이야기를 끝으로 잠시 끊어졌다. 그리고 가만히 술을 마셨다. 얼마쯤 지났을까, 내 어깨로 그녀의 가느다란 떨림이 전해 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감싸 안았다. 한참 후 그녀는 흠뻑 젖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과 무척 자고 싶어요.. 하지만 그럴수가 없어요.. 미안해요..'
 
나는 이유가 궁금하지도 않았고, 더더욱 '미안해요'라는 말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았다. 단지 이 어둠 속에, 이 세상 안에 우리 둘이 함께 있음을 체온으로 느낄 수 있는 지금으로 만족할 뿐이었다. 나는 그녀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 뭔가 스르륵 내려가는가 싶더니 그녀의 손이 어떤 의도를 가진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 깨달은 나는 당황하며 제지하려 했지만 그녀의 손짓은 완강했다.

잠시 후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입술이 허벅지에 닿는 감촉을 느꼈다. 이윽고 그녀의 머리는 나의 것을 품은 채 다정한 일렁임을 시작했다. 깊은 곳에서부터 따뜻함이 밀려왔고 나는 신음을 참을 수 없어졌다. 그것은 비록 완전한 섹스는 아니었을지라도 지상에서 내가 겪어 본 가장 감미로운 섹스임에는 틀림 없었다.
 
마침내 나는 아주 길고 긴 사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가슴 벅찬 쾌감 속에서 알 수 없는 서러움이 그 뒤를 이었다. 결국 분출의 끝에서 나는 참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그녀는 양팔로 당겨 안아 주었고, 그녀의 품안에서, 그녀를 힘주어 붙들며 울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던 날에도 흘리지 못했던 눈물을, 나는 마지막 숨을 짜내듯이 꺼이꺼이 토해 내었다.

그렇게 내 안의 모든 것을 쏟아내고서야 나는 그녀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그것은 몇년만의 새까맣게 깊은 잠이었다.
 
5

다음날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곁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아주 오래 전부터 예정 되어 있던 이별이기라도 한것처럼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받아 들였다. 그녀는 요정이었고 모든 요정들은 새벽이 오면 사라지는 법이니까...

화창한 날이었고 침대에는 환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햇볕에 눈을 감던 나는 문득 주위를 감싸고 있던 공기가 어제와 달라져 있음을 깨달았다. 감격하며 가슴 깊이 신선한 아침 공기를 들여 마시던 중 그녀가 남기고 간 짧은 쪽지를 발견했다.
 
'나를 기억해줘서 고마와요...'

나는 눈을 감고 소중하게 그 쪽지를 들어 천천히 입 속에 넣었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당신을 잊지 않겠노라고 그녀에게, 나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마지막 삼킨 쪽지에서 그녀의 살냄새가 입안 가득 퍼졌다.

그 순간 갑자기 기적이 일어났다. 지난 2년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그리고 지난 몇 개월간 단 한번도 울린적 없던 전화가 그 아침에만 세통이 걸려왔다. 나는 나의 친구들에게 다정하게 안부를 물었고, 아주 오랜만에 바깥 세계와의 소통을 시작했다.
...
 
6

에필로그
이 이야기를 담은 그의 노트는 여기서 끝이 난다. 그는 그 후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만난 적이 없었고, 아이들이 저지른 말썽에 대한 아내의 불평을 달래주면서 퇴근을 하던 길이었다, 라는 이야기 같은 건 사실 누구도 별로 듣고 싶어하지 않는 종류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따라 걸으며 본 것들을 덧붙여 마저 마무리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는다.

바로 오늘 밤 그의 차가 시내를 가로지를 때 그는 갑자기 차를 세워야 했다. 무언가를 본 거 같다고 느낀 것이다. 차를 구석에 아무렇게나 세워두고 그는 지나쳐온 거리를 달려 돌아갔다. 저 멀리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그는 심호흡하며 그들을 향해 걸어간다. 사람들은 한 젊은 여자가 풍채 좋은 늙은 남자에게 악다구니 쓰는 모습을 둘러 싸서 구경하고 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고 짙은 화장을 하고 있는 그녀를 그는 먼발치에서 한눈에 알아본다.
 
그녀의 쌍소리 섞은 절규에 질린 늙은 남자는 그녀를 떼어두고 가버리려 한다. 그녀는 이번엔 그런 그를 붙잡으며 무언가를 절실하게 사정하고 있다. 하지만 남자는 매정하게 그녀를 밀치고 떠나버린다. 그녀는 길위에 쓰러져 울음을 터트린다. 그녀는 너무나 서럽게 울기 시작한다. 이 모든 풍경을 그는 충격과 혼란에 빠져 바라만 보고 있다.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수 없는 멍한 상태로 바보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하고 있다. 여전히 사람들은 그녀가 쓰러져 울고 있는 모습을 웅성 거리며 구경하고 있는 중이다.

순간 주위는 비현실적인 이미지로 변하기 시작하며 그녀와 그의 주위를 감싸온다. 소리는 오프 되어 참을 수 없는 정적으로 가득차 있다. 마침내 그가 숨이 막혀 쓰러질거 같다고 느낄 때쯤 그녀는 천천히 눈물을 닦으며 일어선다. 풍경처럼 흐르는 살색의 이미지들 틈으로 그녀가 어두운 반대편 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하는 모습이 보인다.
 
점점 멀어지던 그녀는 드디어 완벽한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녀의 소멸과 동시에 세상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다. 사람들은 각자의 가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한다. 텅빈 거리에 혼자 남겨져 있던 그도 한참 후에 이윽고 힘없이 발길을 돌린다. 그리고 그의 그림자도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
 
그러나 잠시 후, 그가 갑자기 밤의 그림자 속에서 튀어 오른다. 그리고 그녀가 사라진 방향으로 맹렬히 뛰기 시작한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절박한 표정으로 그녀를 찾고 있다. 그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고 숨소리는 거칠어진다. 그는 쉴새 없이 혼잣말을 되뇌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중얼거림은 밤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나에게도 들려온다. '약속'과 '구원' 이라는 단어가 반복 된다. 약속.. 구원.. 나에게.. 당신에게.. 그리고 나는.. 나만큼은..
 
나만큼은 당신을 기억하고 있어.
 
그 소리침을 마지막으로 그 역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제서야 나는 그의 노트를 덮으며, 맨 첫장에 '기억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라고 휘갈겨 써넣는다.

그리고, 이젠 정말로, 디 엔드. 페이드 아웃.
남로당
대략 2001년 무렵 딴지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잉태.출산된 남녀불꽃로동당
http://burur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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