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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정담] O의 이야기 - 뺨을 후려친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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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정담의 소재를 제공해주신 분은 이니셜의 표시마저도 사양하셨습니다. 익명의 그분께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영화 [피끓는 청춘]

1

당시 나의 학교 앞에는 자그맣고 낡은 학사 주점이 하나 있었다. 어느 학교 앞에나 하나쯤은 있게 마련인, 당시 혁명을 꿈꾸던 청춘들의 아지트이자 어느 시점부터는 못다 이룬 꿈들이 허깨비처럼 떠다니던 폐가 같은 곳. 나의 스물 두 살 청춘의 중요한 한 페이지는 이곳에 관한 삽화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스물 두 살이었던 그 해는 세상을 바꾸기를 꿈꾸던 인간들이 상실감에 빠져 누군가는 변절을, 누군가는 좌절을 하던 시기와 비슷하게 맞물린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리다는 것과 여자라는 것에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던 거 같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의 좌절에 필요 이상으로 상처 받게 만들며 내가 이 낡은 주점에서 취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부여해주곤 했다. 자주 술에 취하는 어린 여대생과 낡은 학사 주점의 기묘한 결합은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 인연이었다.

나는 그렇게 취한 날이면 가끔, 날 처음 이 주점에 데려다 준 그 선배를 떠올렸다. '산으로 간다. 친구들과 함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의 머리를 쓰다듬은 채 학교를 중퇴한 채 떠나버린 그 남자. 가끔 바람 많은 날이면 바람에 실려 그가 어느 현장에서 무엇을 하고 있더라는 소문도 묻어오곤 했다. 그리고 난 그때마다 그의 마지막 대사가 나레이션으로 깔리는, 그가 눈 덮힌 계곡에서 소총 한자루 쥐고 토벌대를 기다리는 이미지에 삼분쯤 빠져들곤 했다. 그런 공상은 보통은 이 주점에서이기 마련이었고, 그렇게 이곳을 추억할 권리는 나에게로 옮겨왔다.
 
2

이 주점은 왕년에 '굉장하게' 운동을 했다던 한 30대 여자 선배가 운영하고 있었다. 주인의 프로필이 그렇다보니 다른 곳보다는 여자들이 편하게 들를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 되어 있었다. 그것과 어떤 개연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들이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가도 불편하지 않은 공간이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그 우울한 유대감으로 인해 아무나와 쉽게 술친구가 될 수 있었는데, 나이에 상관 없이 서른 넘은 그들이 나를 '동지'로서 대해주는 풍경에 나는 한껏 고양 되곤 했었다. '그녀'는 이런 와중에 내가 만나게 된 그 주점의 다양한 술친구 중 하나였다.

나와 그녀는 각자 혼자 와서 술 마실 때가 많았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합석하면서 서로 인사를 하게 되었다. 그녀는 지난 해부터 출강하고 있는 사회학과의 시간강사였고 30대 중반의 유부녀였다. 몇 번의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 '함께 운동을 하다가 결혼한 남편이 허리를 다쳐서 지난 넉달간 섹스를 못했다'는 얘기를 해줄만큼 친한 사이가 되었을 때, 나는 그녀에게 폭음하는 버릇과 기묘한 주사가 있다는 것도 함께 알게 되었다.

그녀의 주사는 흥미로운 면들이 있었다. 내가 감히 근접할 수 없을 만큼 당차고 지적인 그녀였지만 술에 취하면 갑자기 순종적인 게이샤로 돌변했다. 다른 손님들에게 과할 정도로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술 따르며 시중을 들려 했다는 것이다. 쉴새 없이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시중을 들다가, 그러다 지쳐 술이 깰 때 쯤에야 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그녀가 술이 깼을 때 그 술버릇에 관해 지적하자 그녀는 '나에게 지배 당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는건가? 흐흥' 하며 민망해하는 기색 없이 가볍게 웃어 넘겼다.

그러다가 더 술에 취하고 자신의 흥에 못견뎌 날뛰는 상태가 되면 그녀는 웃통을 벗어 자신의 젖가슴을 세상에 공개한 채 테이블 위에 올라가 춤을 추었다. 그런 날이면 남자들의 환호가 이어졌고 순식간에 주점은 묘한 열기에 휩싸이며 축제의 분위기로 달려가곤 했다. 그녀와 술을 마실 때 보통은 맨 정신이었던 나는 주인 언니에게 말려야 하는거 아니냐며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주인언니의 대답은 늘 똑같았다. ' 놔둬, 원래 피가 뜨거운 애인걸. 그리고 가슴도 예쁘잖아.'

그랬다. 사실 그녀의 가슴은 같은 여자인 내가 보기에도 탐스럽고 예뻤다. 그녀의 몸을 훔쳐보고 있자면 나의 선머슴 같은 몸이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움추려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보다 똑똑하고 예쁘고 당당한데다가 가슴마저도 나보다 크고 예쁘다는 것이 가끔은 나에게 싸구려 질투를 불러 일으켰다. 그녀가 저렇게 쉽고 당당하게 가슴을 드러낼 수 있는 이유는 너무나 정열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녀의 가슴이 예쁘기 때문이어서뿐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녀의 그 자신감에서 속물의 냄새를 맡으려 노력했던 셈이다. 그러나 그런 자기보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옷을 벗는 날에는 보통 내가 먼저 술에 취해 버리곤 했다.

그리고 이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그 날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3

그날도 나는 오후 수업을 제 낀 채 혼자 주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도 주점에 나타났다. 우린 원래 만나기로 약속했던 사이처럼 당연스럽게 마주 앉아 술을 마셨다. 장마가 시작 되려 하고 있었고 그날의 공기는 무덥고 끈끈했다. 뭔가 알 수 없는 부글거림과 우울함의 혼재 속에 나는 일찍 술에 취해 하루를 끝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녀도 비슷한 기분이었는지 그날따라 우린 말이 없었다.

해가 지고 꽤 취했다고 느낄 때쯤 그녀가 자세를 바로 잡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곤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나의 술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나는 정갈한 얼굴에 흐트러져 흘러내린 그녀의 옆머리를 보면서 잔뜩 무게를 잡은 채 술잔을 들었다. 지나가는 누군가가 봤다면 나이 든 여자가 앳된 여자에게 공손하게 술을 따르는 풍경의 부자연스러움에 고개를 갸웃거렸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역전 속에서 다소 가학적인 쾌감을 만끽하고 있었던 거 같다. 아마 그렇게 조금 더 있었다면 술과 분위기에 취한 나는 어쩌면 그녀에게 옷을 벗고 춤을 추라고 명령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비에 젖은 머리를 훔치며 새로운 여자가 주점에 들어선 것은.

계속 되는 빗소리와, 건물만큼이나 낡은 민중가요들에 지루해하던 그 주점 손님들의 시선이 전부 그녀에게로 향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단지 그 주점에서 본적 없는 얼굴이란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생긴 여자를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본 경험이 없다는 의미이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길게 옆으로 찢어진 두 눈은 어떤 이국적인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영화에서 본 이집트의 공주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혼자 테이블에 앉아 무엇이던 상관 없다는 태도로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그리고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주점 안의 자신을 훔쳐보는 시선들을 뿌리쳤다. 그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는 고상한 자들 특유의 느릿함과 무료함이 묻어 있었다. 주점은 형식적으로나마 다시 평소의 북적거리을 회복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 내 앞에 앉아 있어야 할 그녀가 어느새 공주에게 다가가 무릎 꿇고 술을 따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잠시 후 강사는 정신을 차렸고, 자신이 했던 행동을 핑계 삼아 공주에게 합석을 제의했다.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삼십대 여자 둘과 이십대 여자 한 명의 길고 긴 술자리는 그렇게 시작 되었다.
 
4

'언니가 보험금을 전부 가로채려 해요..'

우울한 한숨 섞인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그녀가 저 말을 뱉을 때 나는 기원이 불확실한 전율을 느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도 없고, 빗소리는 우중충하게 들려오고 있는 밤의 낡은 주점이었다. 그곳에서 지금 그녀는 독살과 음모가 판을 치는 이집트 왕궁 속의 공주 같은 표정으로 히치콕 영화에서 주로 나올 것 같은 대사를 읊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 거대한 음모의 한 귀퉁이를 엿보고 있는 스릴을 내가 느낀다는 것이 별로 부자연스럽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녀는 부모님과 화해 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에 집을 뛰쳐 나왔다. 그리고 혼자 힘으로 살아왔고 결혼까지 했다. 그러다 힘들게 부모들과 화해하고 그녀의 집으로 모셔온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교통사고로 두분 다 돌아가시게 되었다. 다행히도 그녀의 부모들은 이런 상황을 대비해 보험을 들어놓았었는데 6억쯤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그것을 그녀의 유일한 혈육인 그녀의 언니가 모조리 가져가려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지금이나 당시나 셈에 익숙하지 못한 나는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백프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보험료의 지급 방식도 모르고, 유산을 어떻게 자식 중 한 명이 독차지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이해한 것은 그녀가 그녀의 언니를 매우 증오하고 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잘 보이지 않고선 단 한 푼도 받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지금 굉장한 무력감과 우울함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 등이었다.

잠시 강사와 공주 둘만의 대화가 시작 되었다. 그들의 얘기는 마치 저 멀리 이집트 왕궁에서 벌어지는 일들만큼이나 나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겪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보험금 같은 걸로 속상해서 술 마시고 싶지는 않은 걸, 하며 나는 혼자 술잔을 들었다.
 
5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조금 더 취기가 오르자 우린 장마 진 하루의 울증을 떨쳐내고 반대방향의 조증인 분위기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강사의 게이샤 흉내 이벤트가 벌어져서 사람들을 즐겁게 했고, 사람들의 흥에 자극 받은 그녀는 비틀비틀 취한 걸음을 옮겨 테이블 중앙으로 향했다. 그리고 종종 그랬듯이 익숙하게 자신의 블라우스를 벗어 제꼈다. 남자 손님들의 낯익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이어서 그녀가 브래지어를 벗고 상체를 흔들자 그녀의 예쁜 가슴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출렁임은 술집을 출렁이게 했고, 나의 비위를 출렁이게 했다.
나는 아까부터 아무말 없이 강사를 바라만 보는 공주의 눈길이 부담스러워졌다. 그리고 마치 내가 알몸을 드러낸 것처럼 수치스러웠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술을 마셨다.

'예쁜 몸이네요. 그렇지 않아요?'

공주의 동의를 구하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 드디어 강사의 쇼가 끝났다. 그녀는 왔던 발걸음처럼 다시 비틀비틀 걸어 우리 자리로 돌아왔다. 옷 입으며 강사는 우리 쪽으로 시선을 던지지 못했다. 그제서야 나는 그녀가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깜짝 놀랐다. 늘 이성이 마비된 채 옷을 벗었던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 난 강사가 공주 쪽으로 차마 시선을 던지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그녀가 공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런 쇼를 벌인 것이란 걸 깨달았다. 지금의 그녀는 일부러 그녀의 가슴을 내보였던 것이고, 지금 그녀는 마치 짝사랑하는 소년의 눈에 띄기 위해 억지로 앞에 나가 노래를 부른 소녀처럼 쑥스러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불타는 질투였다. 그리고 나 역시 공주의 마음에 들기 위해 나 자신도 모르게 부단히도 애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린 단 몇 시간 만에 그녀에게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리고 서로 그녀의 눈에 들기 위해 이렇게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서먹한 분위기가 자리에 퍼지려 할 때, 저쪽 자리에서 한 남자가 비틀 거리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그는 시선은 강사를 향한 채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의 또 다른 선배이자 나를 이곳으로 이끈 그이의 동기인 사람. 내가 1학년일 때 늘 나의 감상주의를 꾸짖고 보다 투철해질 것을 요구하던 선배. 한번은 그의 지나치게 길게 이어진 비아냥에 토론 중에 뛰쳐나가 훌쩍인 적도 있었다.
 
6

사상 무장을 그렇게 목놓아 외치던 그 선배는,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는 조선일보의 선언이 채 잉크도 마르기 전에 미군 카투사로 입대했다. 그리고 1년 만에 의가사 제대를 한 후 졸업했고, 자신이 우리 앞에서 그렇게 비판했던 '자본가의 개, 권력의 나팔수 MBC' 에 사회부 기자로 취직했다. 그는 자신이 사회부 기자라는 것이 무언가를 지키고 있다는 증거쯤으로 생각했는지 이 주점에도 종종 얼굴을 내밀며 우리에게 자랑스럽게 명함을 건네곤 했었다. 그와 내키지 않게 합석했던 그 어느 날, 정부와 국회의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토로하던 그에게, 말없이 술만 마시다가 취해버린 나는 참지 못하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산으로 돌아가던 친구들의 눈빛을 기억하긴 하나요?'

나는 그가 저 말을 완벽히 이해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내가 전하고 싶은 뉘앙스만을 받아들이고선 분노하며 흥분했다. 난 술상을 차버리듯이 그 자리를 벗어났고 그 이후론 서로 주점에서 마주치더라도 보이지 않는 존재들인양 행동했다. 그리고 사실이 그랬다. 그와 나는 서로가 이계(異界)에 사는 허깨비였을 뿐이니깐.

그런 그가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넨 것이다. 난 그의 붉게 번득이는 두 눈을 보며 그가 욕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강사의 출렁이던 젖가슴이 술에 취한 그를 흥분 시켰던 것이고, 나의 존재쯤은 여유롭게 넘길 만큼의 다급함을 가져다 준 걸 거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역시, 그는 강사를 바라보며 '합석하시겠냐'고 물어왔다. 새하얗고 고급스럽게 인쇄된 MBC 로고가 찍힌 명함을 건네며.

공주와 강사와 나의 시선들이 서로 교차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내 불쾌감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나는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란 것보다 더욱 놀라운 풍경이 이어서 벌어졌다.

'꺼져요. 우린 당신이 싫으니까.'

계속 품위 있게 미소를 잃고 있지 않던 공주가 늙은 마담 같은 표정을 얼굴 가득 풍기며 저런 말을 그에게 뱉은 것이다. 어설픈 욕이 아니라 너무나 노련하게 분명한 의지를 담아 상대를 움찔하게 만드는 그런 언어였다. 나의 선배가 순식간에 제정신을 차리고 얼굴이 붉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로 돌아가려 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졌다. 그래서 배를 잡으며 뒹굴듯이 웃었다. 나의 요란한 웃음소리에 그가 돌아섰다. 그리고 이미 충분히 나쁜 결정을 했던 그는 더욱 나쁜 선택을 했다.

'아니 뭐 이딴 썅년들이...'

순간 '짝' 소리가 주점에 울려 퍼졌다.

공주가 그의 뺨을 있는 힘껏 갈긴 것이다. 주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주인 언니는 손님들을 정리하고 망가져버리고 어쩔줄 몰라하는 선배를 제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제서야 난 그녀가 '왕년에 굉장하게' 운동을 했다던 소문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얼른 이만 자리를 피해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우린 당당하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로 요 앞에 있는 우리 집에 가서 술 한잔 더 할래요?'

이미 만취했지만 헤어지기 아쉬워서 길가에 멀뚱히 서 있던 나와 강사에게 저 이상의 반가운 제안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집은 걸어서 5분쯤 거리에 있던 고급스러운 아파트 촌에 있었다. 우린 주점에서 나와 비 그친 밤거리를 어깨동무를 하고 걷기 시작했다. 그날 나의 어깨에는 근래 들어 처음으로 만끽한 승리감의 기쁨이 고스란히 얹혀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더해 공주의 궁전에 초대 받아 간다는 설레임과 함께 이유를 알 수 없는 묘한 흥분이 발걸음마다 떨림으로 번져갔다.

사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날 밤에 벌어진 일들을 전혀 예상한 바가 없었다고 스스로에게 주장했지만, 그 순간의 흥분을 떠올려보면 진실로 그랬는지에 대해 문득 자신이 없어진다. 평범하지 않은 밤이 될 거라는 예감은 어쩌면 이미 충분했는지도 모른다. 문을 열었을 때 강하게 코를 덮쳐 오던 그 진했던 향 타는 냄새에서마저도 이미 그 전조는 가득 숨어 있었던 게 아닐까, 라고 지금의 나는 떠올린다는 것이다..

- to be continued.. -
남로당
대략 2001년 무렵 딴지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잉태.출산된 남녀불꽃로동당
http://burur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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