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경험담#4] 에셈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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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달하고 지배적인 성향을 지니셨던 A님은 환상 속 복종을 통해 마음의 균형을 맞추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여성이 복종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분은 복종보다는 오직 학대라는 테마에 이끌리는 경우도 있었지요. 보수적인 가정에서 성장하신 B님이 그러한 예에 해당하셨습니다. 블로그가 한창 개인 취향의 공유 수단으로 사랑받던 시절, 저 또한 에셈을 주제로 한 블로그를 조용히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주로 개인적인 단상이나 에셈의 역사적, 철학적 배경에 관한 글을 올렸고, 자극적인 이미지나 노골적인 표현과는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법 많은 분들이 방문해 주셨습니다. 그 블로그에 ‘에셈의 기원’에 대한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중세 말기, 교황의 권위가 쇠퇴하던 시기. 그 흐름을 되돌리기 위한 방안으로 마녀사냥이 시작되었습니다. 점성술과 약초를 다루던 과부들이 표적이 되었고, 유럽 전역은 고문과 혐의 속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그 고문의 모든 비용이 마녀로 지목된 자에게 청구되는 구조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습니다. 고문관의 급료, 수감 중의 식비와 침구, 심지어 고문도구의 제작비용까지 모두 혐의자에게 청구되었습니다. 이는 곧 수익을 낳는 구조로 진화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신앙의 열정이었던 것이 이윽고 어둠의 사업으로 변질되었던 것입니다. 표적은 가난한 여성에서 점차 재산을 가진 여성으로 옮겨갔고, 고문은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천천히’ 고통을 주며 청구 항목을 늘리는 방식으로 진화했습니다. 그래서 실제 고통은 최소화하면서 심리적 공포와 수치심을 극대화하는 기묘한 고문도구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마녀의 배’라는 기구는 서양배 모양의 금속 장치를 여성의 신체에 삽입하고 나사를 돌려 확장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구는 실제로는 연약한 합금으로 제작되어 안에서 휘어지기 일쑤였고, 그 결과 고문관은 “기구를 휘게 만든 마녀의 마법”이라며 또다시 수리비용과 새로운 기구 제작비를 청구하였습니다. 정교하게 계산된 이 구조는, 고문이라는 이름의 가면을 쓴 수익 사업이었습니다. 심지어 ‘고문의자’처럼 생명을 위협하던 기구조차 뾰족한 금속 대신 나무 송곳으로 바뀌었고, 그 느낌은 오히려 지압에 가까웠습니다. 네덜란드의 고문박물관에서는 이런 고문기구의 진화 과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통보다는 천천히 지속되는 불편함과 수치, 그리고 때로는 자극적 쾌락을 유발할 수 있는 설계는 당시 귀족들의 은밀한 흥미를 자극하기 충분했습니다. 삼각목마 역시 원래는 뾰족한 형틀 위에 여성의 무게를 실어 고통을 주는 도구였으나, 후에는 그 위에 자극적인 형태를 갖춘 봉을 얹어 성기에 상처가 아니라 감각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 결과, 고문을 당하는 여인은 아픔보다 묘한 자극을 느꼈을 가능성이 있고, 이를 지켜보는 고문관은 일종의 왜곡된 희열을 경험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마녀사냥은 신앙에서 수익으로, 그리고 쾌락으로까지 그 목적을 확장하게 되었고, 결국 흑사병의 대유행 속에 그 광풍은 종식되었습니다. 종교 개혁과 과학의 진보 속에서 마녀사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귀족들의 성 지하실에는 여전히 수많은 고문기구들이 남겨졌습니다. 그 장비들은 공포의 유산이자 은밀한 탐닉의 유물로 각 성에 조용히 보관되었고, 이후 후손들의 사적인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재갈, 눈가리개, 철가면, 형틀, 속박 장비, 유두집게, 그리고 소리는 크지만 고통은 적은 채찍들까지— 오늘날 에셈에서 쓰이는 많은 도구들은 바로 그 지하 감옥의 잔향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내용을 정리하여 블로그에 올렸지만, 조회수나 반응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너무 조용히 지나간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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