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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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좋아하는 스타강사이자 저명한 심리학 교수가 한 말이다. 사랑을 실패한 직후에 그를 만나 그의 글귀를 만나서 더욱 내게 닿는 말이었다. 매해 이 말은 더 깊고 진하며 다르게 다가온다. ‘사랑’이라는 감정 또한 그 자체가 주는 의미와 느낌이 사뭇 다를 것이다. 짧으면 일주일, 혹은 매해 사랑은 내 마음을 혹은 나 자체를 바꿔놓을 것이다. 성장하게 하기도, 정체하게 하기도. 분노를 일으키기도 기쁨을 주기도. 나는 올해의 사랑을 짧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재작년 여름에 사람들에게 만화 하나를 소개했었다.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이라는 만화다. 일본 중년 남성인 콘도와 여고생 타치바나의 이야기이다. 뭔가 감이 오는가? 당신이 짚은 감이 내가 의도한 게 들어맞으면 틀렸다. 어줍잖은 클리셰와 외설과 예술의 경계를 가미한 자극적인 금기의 사랑이야기가 아니었다. 순수함 그 자체의 결정 같은 드라마였다. 사랑을 다루고 있었지만 연예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은 아니었다. 꿈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설픔에 맞서는 이야기이다. “슬픈 여자는 싫어.” 재작년 내가 입버릇처럼 하고 다닌 말이다. 그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주인공인 여고생 타치바나는 슬픈 여자였다. 뛰어난 기록을 자랑하는 육상부 에이스였는데,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육상부를 그만두었다. 그만 두었던 날, 그녀의 마음처럼 비가 오는 거리를 피해 그녀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들어가 블랙커피를 주문했다. 그곳에서 멍하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창밖에 비친 절망스러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때. 레스토랑의 점장인 콘도가 그녀 옆에 등장한다. 그는 작은 우유(크림)를 손에서 없앴다, 다시 나오게 하는 작은 마술을 보여주고는, “비는 곧 그칠 거 에요.” 라는 말과 함께 크림을 그녀 곁에 두고 간다. 타치바나의 마음에 그녀의 사랑이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다른 때에, 다른 순간에 그녀가 그를 마주했다면 상황은 무척 달랐을 것이다. 그랬다면 하필 아버지뻘의 남자를 선망하고 사랑하게 되는 일도, 크림 하나에 커다란 위안을 받게 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 후로 타치바나는 레스토랑에서 파트타임 잡을 얻어 일했다. 이유는 그저 콘도였다. 육상부를 그만두게 되어서 사랑을 시작하는 선택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녀의 그런 마음가짐이 하찮거나 어수룩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저 착각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순수하고 거짓 없는 착각. 타치바나는 결국 그에게 마음을 고백한다. 상황 때문에 답을 듣지 않았지만, 콘도는 에둘러 거절했고, 그녀는 고집스럽게 그를 계속 쫓았다. 그녀의 사랑이라는 꿈은 콘도에게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다. 그는 그녀를 싫어하진 않았다. 그러나 육욕과 본능 이전에 타인의 시선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가두고, 분위기를 읽으며, 감정적인 행동을 피하는 것이 그의 45년간의 삶에 있어 가장 뛰어난 방패나 무기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반면 극명하게 타치바나는 사랑(꿈)만 있으면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다 생각하는 소녀였기에 둘은 더욱 갈등을 맺었다. 종국에는 서로에게 사랑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꿈이라는 것을 서로 되찾게끔 응원하는 조력자가 되어갔다. 콘도는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꿈을, 타치바나는 자신을 찾는 목표를 가지고. 각설하고, 사람들은 많은 감정들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며 산다. 성욕, 동경, 존경, 동정, 호감.......시작은 모든 착각으로 시작한다. 그런 것들이 모두 가짜이고 틀렸다고 말 할 정도로 아직 잘난 사람은 아니다. 모두 착각으로 시작해서 미친 듯이 깊어가고 물들어져간다.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올해의 내 사랑은 어떻게 시작된 걸까, 아니 어떤 착각으로 시작 된 걸까. 그렇다면 착각 아닌 사랑은 무엇일까. 그. 혹은 그녀의 뒷모습에서 성욕이나 존경 등등을 느끼지 않는 것? 나는 이렇게 본다. 종종 그 사람의 뒷모습에서 외로움이나 슬픔을 발견 할 수도, 성욕을 발견할 수도, 선망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점점 멀어지거나 그대로 멈춰있거나 한 그 사람의 뒷모습을. 다급히 돌아 세우거나, 화나서 소리를 지르거나, 애가타서 발을 동동 구르거나, 존경심을 담아 이내 표현하고 말거나, 어찌 하겠다는 마음 없이 묵묵히 지켜보고 싶은 것. 이것이 올해의 내 사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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