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기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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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2주기입니다.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여 글을 남깁니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주로 꼽히는 작품은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정도 되겠지요. 이태원 참사로부터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세월호 참사가 있습니다. 당시 김훈의 기고문을 읽고 가슴을 짓누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쥐어준 용돈 6만원을 이야기하며 그것은 단지 지폐도 구매력도 아닌 무언가 여고생의 꿈에 추억 하나를 남길 일에 쓰였어야 하는데 바닷물에 젖은 채로 돌아올 뿐이었다, 이러저러하여 침몰되었다는 조사 결과를 읽어도 그것은 물리적으로 당연한 현상을 기술한 것에 불과하고 진정 원인을 밝히지 못했다고. 어쩌다 김애란 작가의 단편집 바깥은 여름을 읽었고, 죽음 또는 상실의 경험을 진하게 풀어낸 글들이었습니다. 채식주의자는 조금 다르지만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같은 흐름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원인을 알 수도 없고, 사실상 은폐했고, 책임도 묻지 못하고, 책임을 지려는 자도 없이, 망자의 이름조차도 익명화된 참사. 여러분은 추모제에 가보셨나요? 저는 인근에 살아서 시간 나는대로 찾아갔습니다. 관제 분향소를 거부하여 유가족이 따로 차린 분향소가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사람이 많지 않던 시간대에 한 여학생이 절규했습니다. 왜 거기에 있어, 그렇게 절규했습니다. 절규를 들어보셨나요? 저는 그 때 처음으로 절규를 들어보았습니다. 비통과 분노와 슬픔이 아랫배부터 정수리까지 울리면서고 목청을 긁는, 더 묘사할 수 없는 그런 절규를 그 날 들었습니다. 제 주변엔, 그 건너라도 참사에 휘말린 이가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가보았지만, 그 절규하는 여학생 앞에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유가족 분향소 바로 옆에는 오만하고도 증오에 가득한 언사를 래핑한 차량이 주차된 채로, 스피커로 피해자들 그리고 유가족들을 모욕하는 저주를 앰프로 틀어놓고 있었습니다. 발길을 돌려 이태원 해밀턴 호텔로 걸어갔습니다. 곳곳에 메모와 촛불과 간식거리, 장식이 가득했습니다. 메모지에 적은 마음, 네가 좋아했어서 이제라도 네게 주고 싶은 마음, 수많은 피해자를 위한 수많은 마음들이 여러 가지 물건들로 모여있었습니다. 그리고 전경 버스가 여러 대 서있었고, 여기 저기 전경들이 대기하고 순찰하고 또한, 무엇을 막아야 하는지 아무 것도 없음에도, 무언갈 상정하여 스크럼을 짜 도열한 무리도 있었습니다. 해밀턴 호텔 건너편에는 한 남자가 휴대용 스피커를 들고 마이크를 잡고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심판입니다, 타락하여 벌 받은 것입니다, 회개하십시오. 참사 피해자들이 타락하여 벌받아 죽은 것이라 열변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뒤틀리는 심사를 꾹 누르며 그에게 다가가 그만하라 말했습니다. 그는 방해하지 말고 비키라 하더군요. 나는 절규도 처음 겪었지만 광신도 이 날 처음 겪었습니다. 눈을 보고 뭘 아는 능력이 있을까 싶었는데, 틀림없이도 그의 눈은 광기의 확신으로 가득하더군요. 끝내 마이크를 낚아챘고, 실랑이를 하는 와중에도 적극적인 폭력은 하지 않으려 했고-결과적으로 그러지 않았습니다- 스피커에 연결된 선을 뽑는 식으로 발언을 막았습니다. 제가 그럴 자격이 있었을까요? 추모하는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그를 에워싸기 시작했기 때문에, 험한 말들 욕설들이 튀어나오고 흐느끼는 목소리들 격해지는 감정들, 그를 제지하지 않으면 정말 맞아죽겠다 싶은 상황이라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크럼을 짜던 전경들 경찰들은 스크럼만 지키고 있었고, 경찰이 와달라 경찰을 불러달라고 하였어야 겨우 오더군요. 그제서야 그 친구를 군중과 분리했고. 무얼 위한 것인지 몰랐던 스크럼은 그를 위한 스크럼이 되었습니다. 이 날의 경험이 상당히 컸던 것 같습니다. 꽤 오랜 시간 마음이 회색이 되더군요. 유가족도 직간접적인 지인도 아니어서 그들에 비할 바 있겠냐마는, 비통까진 아니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 환멸이 싹텄던 것 같습니다. 2주기를 앞두고 거의 대부분의 재판은 관련 책임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애초 이 대부분의 재판에 올라간 이들조차 정말 관련 책임자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고. 행안부 장관도 그대로고 아무도 사과하지 않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아직도 피해자들의 이름은 익명입니다. 쿠데타군에게, 서북청년단에게 무고하게 죽은 이들 그리고 그 유가족과 지인으로 그 죽음을 발설하지도 못하고 매도당하고 사회적으로 조리돌림 당한 일들. 억울한 죽음, 죽을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천재지변 기타 사고도 아니면서 살해당한 죽음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죽음이 규명되지 못하여, 장례의 제의를 하지 못하여 삶이 장례가 되고 고혼의 넋을 달랠 길이 없어 삶에서 한 치도 내딛을 수 없어 가족 친지의 죽음 언저리에서 여생을 방황하는 이들. 80년 전, 40년 전, 10년 전, 불과 2년 전. 우리 영혼에 지워질 수 없는 멍울이 늘어만 가는군요. 묵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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