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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의 의미 (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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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왁싱한 게 나아? 아님 그 전이 좋아?”
“한 게 훨씬 좋지.”
“훨씬?”
“훨씬.” 너는 맨들한 내 살갗을 살살 쓰다듬었다. 으음, 기분 좋아. 욕망이 아닌 손도 좋았다. 꼴리게 하려는 손이 아니라 뭐랄까, 정말 문자 그대로 쓰다듬는 거.
그대로 기분 좋은 잠에 빠졌다. 혼자일 때에는 종종 잘 못 자는 일이 있어, 대개 약물의 도움을 받곤 하는데 너랑 함께인 날은 단 한 번도 못 잔 적이 없다. 그러나 뒤척임이 없진 않았다. 너도 그랬다.
이불 속이 습해진 내가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뒤척거리면서 이불을 들추거나, 아니면 추워져서 이불을 다시 덮을 때마다 너는 “으음,” 낮게 울렸다. 그럴 때마다 한 번을 빼지 않고 내 골반 위에 다리를 올렸다가, 팔베개한 손을 다시 정돈하거나 아니면 양팔로 나를 끌어안거나. 바디필로우.

“나랑 있을 때에도 가위 눌린 적 있어?”
“음, 어, 없네.”
중요한 일정을 마치고 난 직후부터 며칠 간 계속해서 가위와 악몽에 시달렸다는 투정을 한 적이 있다.
“근데 나 보통 가위 눌리면 다시 그냥 자. 악몽 꿔도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하면 깨더라.”
“대단하네.”
“아니면 꿈 속의 내가 죽는 순간에 깨.”
“가위, 그거 그냥 몸이 피곤한 거래. 얕게 자서.”
“응, 안 무서워.”
너는 다행이라는 말을 대신해서 더 세게 나를 끌어안았다. 몇 번을 뒤척이더라도 기분 좋은 잠이었다.


30일 중 너는 28일을 일했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는 그렇다. 일이 좋다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일이 좋다고는 해도 일보다 쉼을 더 좋아하는 통에 지금의 상황이 되었지만. 너는 하루에 몇 시간이라도 일하고 싶어 했다.
“평생 일할 건데, 반발감 심하면 평생 고통 받으면서 사는 거야.”
“오, 맞아. 무슨 일을 해도 재밌었어, 아직까지는. 사람이 문제라면 문제였지.”
“맞아, 사람.”
평일, 모두가 퇴근해 있을 시간까지도 너는 일할 때가 잦았다. 그래서인지 너의 주말 오전은 그리도 빠르게 흘렀나.
먼저 깬 내가 휴대폰으로 밀린 답장과 확인을 마치고 나서 지금처럼 일기를 쓰고 있다 보면 특별히 흔들어 깨우는 일이 없어도 부스스하게 깬 네가 등 뒤에서 가슴을 쥐어 오는 일도 잦았다. 그렇게 네가 나를 부르면 나는 “으응.”하고 대답했다. 잘 잤느냐는 물음과 잘 잤다는 대답을 대신했다.

그 날은 확인할 것들이 적기도 했고, 전날 채우지 못 한 욕조가 나를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뒤척이다가 이내 이불을 박차고 침대를 빠져나왔다. 너는 이 곳이 크고 깊어서, 소금을 함께 제공해 줘서 좋다고 했다.
한 2년 전, 당시의 남자친구와 함께 사용하려고 샀던 입욕제는 요즘의 너와 계속해서 소진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집에는 한 무더기가 남아 있고.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것도 그렇고, 네가 좋다는데 마다할 이유 있는가. 나도 좋다.
“미끌미끌해졌어.”
“두 개 가져올 걸 그랬다. 욕조가 커서 하나만 풀었더니 그닥이야.”
“좋아.”
“응, 따숩다.”
“따끈따끈.”
노곤했다. 미끄럽고 따뜻한 물이 가득 담긴 욕조 속에 고개만 빼꼼하게 내민 채로, 네가 어제 집어들었던 요거트를 함께 나눠 먹었다. 과자 씹는 소리가 욕실 안에 울려 퍼졌다.
슬슬 더웠다. 너도 더웠는지 송글송글한 구레나룻을 하고서는 “으어-”하는 외마디와 함께 누웠다. 그럼 나도 가만 있을 수는 없지. 흐느적, 해파리처럼 네 위에 포개어 올라 앉았다. 당연한 듯이 발딱 서 있는 네 가운데가 웃겼다.
“하고 싶지?”
“아니.” 너도 웃었다. 내가 그렇게나 가소로운가.
“넣고 싶잖아.”
“전혀.”
“‘박아 주세요.’ 해 봐.”
“박아 봐.”
“어, 말버릇 봐.”
“박아 봐, 빨리, 씨발년아.”
젖은 손이 내 머리칼을 움켰다. 미끄럽고 뜨겁고 딱딱한 게 순식간에 몸을 관통했다. 물이 일시에 출렁였다. 나는 찡그렸고 너는 웃었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너도 그랬던 것 같다. 내 안에서 네가 움찔거릴 때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는데, 네가 ‘하하하’하고 큰 소리로 웃을 때마다 내 안이 크게 울려서 나는 찌푸린 미간에 힘을 풀어낼 수가 없었다. 척추에 순간순간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네 말을 빌리자면 ‘존나게 움찔거렸다.’
욕조에서 나오는 순간은 매번 겁난다. 제대로 바닥을 디디지 못 한 채로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다시는 일어나지 못 하는 상황을 종종 상상하곤 한다. 아니면 넘어지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척추를 삔다거나.
“복상사나 복하사하면 얼마나 끔찍할까.”
“음- 그렇네.”
“남겨진 사람.”
“끔찍하겠다.”
손바닥을 뒤통수에 받치고 누운 네 가슴팍을 베고 누워서 쪼그라든 네 것을 조물락거리는 것을 좋아했다.


다행스럽게도 주말의 오전보다 낮은 조금은 더디 흐르는 듯했다. 학원가에 위치한 분식집의 치즈돈까스를 나는 좋아했다. 그곳을 운영하는 노부부가 직접 만든 돈까스소스와 경계심 많은 앙칼진 말티즈도.
분식집의 세월만큼이나 나이를 많이 먹은 강아지였다. 그 날은 강아지가 보이지 않았다. 분식집 한 켠, 울타리와 강아지 집이 치워져 있었고 그 자리에는 커다란 냉장고가 자리해 있었다. 조금 울적해져서 괜히 더 수다스럽게 굴었다.
“여기 원래 강아지 있었다. 어제 우리 노래방에서 본 강아지랑 비슷해.”
“귀여웠겠네.”
“응, 엄청 앙칼져. 올 때마다 ‘오늘은 친해져야지.’해 놓고 간식을 한 번도 안 사 왔어, 오늘도.”
“다음에 주면 되지.”
“원래 저 냉장고 있는 자리가 강아지 자리였는데.”
“어디로 갔을까.”
돈까스와 밑반찬을 내어 주시는 동안에 말을 붙여 볼까, 두어 번 생각했다가 이내 접었다.
“음, 맛있다.” 좋아해 줘서 좋았다.
그리고 한 시도 장난을 치지 않으면 가시가 돋는 나는,
“마트, 다녀오셨어요?”
“아니, 영기엄마가 텃밭에서 고구마호박을…”
“고구마호박이요?”
너와 나는 소근소근 고함을 질렀다.
“호박고구마!!!”
금세 웃는 내가 우스웠다. 그리고 딸랑, 종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 보니 할아버지와 함께 말티즈가 있었다. 화색이 돌았다. 나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아까 내가 말한 강아지야!”
강아지는 웬 일로 짖지 않았고, 우리 테이블 아래로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더니 네가 앉은 주변을 맴도는 듯했다.
“아유, 여기저기 침 묻히고 다니지 말라 그랬더니. 미안해요.”
“괜찮아요. 좋아요.”
좋아해 줘서 좋았다.

전 날에도 노견을 봤다. 자주 가는 ‘동노’. 너는 ‘동노’가 어색하댔다. 그러면서, “코노 위치 어디야?” 그랬다.
전화를 끊고서 부르고 있던 노래 한 곡을 다 마치기도 전에 유리창 밖으로 나를 응시하는 네 눈과 마주쳤다. 너는 꽤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아쉽게 CCTV를 발견하기도 했고, 워낙에 자주 가는 곳이기도 했고, 주인 할아버지께서 5분에 한 번 꼴로 정찰을 하시는 바람에 허튼 짓은 조금밖에 할 수 없었다. 그 곳의 노견은 동노 복도 곳곳을 비틀거리며 산책하는 중이었다.

이발을 갓 마치고 온 너는 멀쑥했다. 얼굴 군데군데에 붙은 머리카락 조각들만 빼면.
돌이켜 생각해 보니 처음 만나던 날, 너는 머리가 꽤 길었다. 지금은 그 이유가 생각나지 않지만 전에 나눴던 얘기들로 미루어 생각했을 때에 어쩌면 네가 기부를 목적으로 기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기부하려고? 머리카락.”
“아니, 그냥 자를 시간이 없었어. 서너 달 됐나. 몇 달 됐는지도 모르겠네.”
“나는 기부해. 자를 때마다.”
“멋지네.”
그리고 그 날로부터 얼마 안 있어 너는 짧은 머리를 하고 나타났고, 그 날 이후 두 번째의 이발. 곱슬머리. 네가 내 젖꼭지를 잘근거릴 때에 네 머리를 쓰다듬으면 아주 옅게 샴푸냄새가 났다.
네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 조각들 몇 개를 떼어내는 동안 너는 말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벌어져 있는 입술 안으로 새끼손가락을 들이밀자, 너는 놀라지도 않고 눈을 부릅 뜨더니 펠라치오하는 시늉을 했다. 야해 빠졌다. 나는 당혹스러움이 없는, 급기야는 야한 얼굴에 외려 당황해서 ‘하하하’ 웃었고 손가락을 곧장 빼냈더니 너는 내 손목을 쥐고는 어디로도 도망가지 못 하도록. 꼴렸다.
“변태야.”
“응.”

그러고 보면 너는 당최 당황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조급한 적도 없었다. 정신 없어 보인 적은 있어도 아직까지 당황은 없었다.
“당황을 한 번을 안 하네.”
“음. 그런가?”
‘세계 주류백화점’. 어릴 때엔 동네마다 한 군데씩 있었는데 이제는 시간 속으로 스러지는 것들 중 하나. 반가운 마음에 어떤 술들이 있나 두리번거렸다. 어릴 때에 즐겨 마시던 술들이 한 무더기였다.
“사장님 되게 똑똑하게 운영하시는 것 같아. 배워야겠다.”
“응, 어떻게 아이스크림을 같이 파시네.”
“그러게. 애기들 데려오는 손님이 많은가.”
“아니면 우리처럼 구경만 하고 안 사는 손님들일 수도. 공짜관람 미안하잖아. 그러니까 나오는 길에 하나씩.”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바 아이스크림을 부스럭, 달랑거렸다.
“얼음보숭이가 됐네.”
“이 아이스크림도 나이 많은가 보다.”
“갱얼쥐들.”
느리게 흐르는 주말 낮 속에서 차 안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왜 장난을 치고 싶어지는지 모르겠다. 모르긴 몰라도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이미 몇 입 베어 문 아이스크림을 빨아들였다. 입술이 찼다. 네 눈을 쳐다보고 있으면 곧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 눈에 조금 힘을 줬던 것 같다. 정말 너는 당황을 하나도 안 했다. 웃으면서 내 볼이 쏙 들어간 부분을 한 손으로 쥐고 흔들다가, 내가 눈을 질끈 감고 아이스크림을 뱉어내자 비어 있는 입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입 안을 헤집기도.


시간이 유독 느리게 흐른다고 느낀 그 날, 강아지들과 세계주류백화점을 비롯한 스러져 가는 것들, 그리고 존재와 부재에 대해 생각했었다. 이 생각들 역시 스러지겠지만.
존재는 역시나 부재로서 증명되는 듯했다. 없어야지만이 우리는 대상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마련이고, 정작 눈 앞에 당면한 때에는 그것을 잊기 쉽다. 그러니까 “네가 필요해.”하던 그 대사는 단 하나도 비겁하지 않다. 당신의 소중함을 지각하고 있다는 말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사랑과 결부시킨다면 의미는 달라지겠지.
너는 고마움에 대해 종종 얘기하곤 했다. 나는 잊지 않아야 한다고 그랬다. 잊고 싶지 않다고 내 기억력을 다시금 꾸짖었다. 그렇다면 부재가 부재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부재라고 칭할 수 있을까. 부재가 이미 존재하는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좋을까.
잊혀져 가는 과정들을 나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 존재들의 부재를 안타까이 여기는 내 마음이 안타까운 걸까.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고 널 사랑하고 있는 나의 마음을 사랑하는 게 아닌지. 어떤 노래 가사가 스쳐지나가던 중에 너와 눈이 마주쳤다.
“머리 예쁘다.”
“고마워.”


“데려다 줘서 고마워.”
조수석 문이 닫힌 후에도 한참이나 너는 멈춰 서 있었다. 뒤돌아 선 나도 발을 뗄 수가 없었다.
퇴색되는 것들을 뒤로하고 나는 그 어떤 의미도, 의미의 의미도 알 수 없었다.
익명
내가 누군지 맞춰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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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24-03-19 11:24:48
시간 속으로 스러지는 것들이라는 관찰 좋네요
익명 / 고맙습니다 대단한 건 아니고요 ㅎㅎ
익명 2024-03-17 20:09:29
익명 2024-03-17 20: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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