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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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야 할 일들도 있겠지만, 잊어야 하는 일들도 있는 거야.”
엄마는 오랜만에 전한 친구 소식에 반가워 했다. 나는 엄마에게 L이 곧 결혼할 것 같다고 전했다. 만난 적은 없지만 구전으로 알음알음 L의 남자친구를 들어 왔었다. 사실 청첩장은 고사하고 프로포즈 소식도 없었지만 무언가 결혼할 것 같았다. L이 그런 사람을 만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P의 소식도. “P가 곧 결혼하나 봐. 좋은 사람 만났나 보더라고. 예쁘더라.” “어머, 얼굴을 아는 사람이니?” “아니 얼굴은 몰라. 그냥 행동이나 생각하는 게. 결혼 소식도 직접 알려준 건 아니고…….” “그랬구나. ㅇㅇ이 마음은 좀 어때?” “나야 뭐 마음 쓸 게 있나. P가 좀 싹싹해야지. 잘 살 거 같어.” “응, 다행이네.” 엄마는 P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집에 데려 갔던 첫 남자친구이기도 했고 그만큼이나 내가 많이 의지했기 때문에 엄마는 P에게 신세를 진다고 생각했으니까. 엄마의 부재를 P가 일부 대신했다고 엄마는 생각했을 것이다. 둘이 담배만 끊으면 딱이겠구만! 그러다가 엄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엄마는 내가 누구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엄마는 ‘잊어야만 하는 것들’을 이야기했다. 엄마도 나도 그 사람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엄마가 지칭하는 잊어야만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오래 기다려 낳은 발 작은 첫 딸의 머릿속이 무엇으로 부산한지를 엄마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는 아마 소중한 딸이 괴롭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엄마, 근데 나는 그 사람 때문에 괴로웠던 적이 없었다. 없어서 괴로운 적은 가끔. “에이, 엄마부터 잘해야 하는데. 그치?” 엄마는 멋쩍었는지 수줍게 웃었다. “왜, 부부클리닉 강의하는 사람들도 집에 가면 언성 높이기도 하는가 보더라.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것처럼…” “엄마, 사과 깎아 줄까?” “그래~ 한 개만 깎아다 줄래?” 엄마는 영영이 자책이었다. 딸을 위하는 마음을 전하다가도 끝은 꼭 자책이었다. 엄마를 안아주는 의젓한 딸이 아니라서 차라리 말을 끊어버리고 마는 거지. 불 켜지 않은 주방에서 그제는 양파와 감자를 썰고 어제는 고기를 썰었던 칼로 사과를 깎았다. 사과의 살점이 깊게 패였다. 언젠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사과는 시엄마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몰래 깎아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어, 근데 결혼은 혼자 하는 게 아니었지, 참’하고 스스로를 꾸짖었다. L은 나답지 않다며 크게 놀랐다. “너나, 엄마아빠처럼 깊게 오래 아는 사람들이 아니면 이제 말을 잘 못 하겠어야.” “왜야.” “어릴 때는 걍 피해주기 싫다는 마음만 있었는디, 그거 아니면 걍 나 하고 싶은 거 존나 했자내.” “어. 니 존나 미친년이 다 하고 다녔어.” “근디 이게 머리가 굵어서 근가, 인제는 내가 의무가 되는 걸 못 견디겠어야.” “그게 뭐대. 하기 싫으면 시발놈들아 거절을 해야.” “야, 우리도 살다 보면야, 하기 싫은디 거절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냐.” “아 그네.” “나는 안 내키는 거 어지간하면 잘해야. 근디 그 대상이 내가 되는 게 존나 끔찍한 거여.” 나는 L이랑 대화할 때면 전라도 사투리를 걸죽하게 쓰곤 했다. [끔찌칸]이 아니고 [끔찌간]. 어릴 때엔 피해주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 무렵에 잘 팔렸던 책 중 하나가 거절 당할 용기였나 미움 받을 용기였나. 아무튼 거절 몇 번 당해보고 나니 거절을 당하는 것은 큰 두려움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근데 이제는 내가 상대에게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이 싫다. 거절할 수 없는 대상이 되는 것이 거절 당하는 것보다 싫어서 이제는 그 어떤 제안도 질문도 하지 않는 수동적이고 말수 없는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 내 최근의 고민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제안을 흔쾌하게 받아들이는 것과 묻는 말에 반가이 대답하는 것. 누군가가 말하기를 ‘그 자리에 있으면 된다’던데, 이걸 두고 한 얘기는 아니겠다. 내가 이런 고민을 안고 있는 것을 알면 그 사람은 나를 더러 병신 같다고 할까. 입장차이라고, 제안이나 질문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나를 부단히도 떠보는 사람, 오지고 지리게 밀당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지친 사람이 떠나고 나면 나는 또 다시 ‘이용 당하고 버림 받았다’며 끝없이 찌글거릴 테고. 아, 지겹다. 더 큰 고민은 이러한 고민을 푸념만 할 줄 알지 해결하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나는 정말 문자그대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오매불망인 인간이었다. L은 대화가 아니면 아무것도 해결할 수 있지 않다고 했다. 내 생각도 같았다. 푸념이 해소해 주는 것은 잠시간이었다. 섹스와 같아서 그 잠시 동안만 잊게 해 주는 역할을 했고, 그 이후에 같은 양의 외로움이나 괴로움을 맞닥뜨리면 나는 그 전보다 더 외로워 했고 괴로워 했다. 그런데 대화로써도 해결되지 않는 것들은 그럼? 어떤 것들은 입을 닫았을 때 비로소 전달된다. 무응답도 응답이었다. 오해 또한 하나의 이해였고, 전부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해이자 오만이었다. “너무 좋다.” 또는 “아주 좋아.” 너는 종종 그랬다. “뭐가?”하고 물었을 때 너는 잠시 말이 없다가, “누워 있는 거.”라고 답하면 나는 “먹눕 짱이야.”하고 천연덕스러워야 했다. 그러면 너는 말 없이 나를 끌어안았다. 나도 좋았다. 너를 기다리면서 주방에서 덜그럭거렸던 것, 집 곳곳에 탈취제를 뿌리고 향초 심지에 불을 당긴 것도 좋았고, 간이 맞지 않는 음식들을 시종일관 “진짜 맛있다.”며 먹어 주는 것도 좋았다. 와사비를 너무 많이 넣은 초밥을 먹으면서 정수리를 콩콩 치는 모습도. 설거지를 하는 뒷모습도 좋고, 늘어지려던 나를 붙잡고 눕기 전에 산책 나가자고 했던 것도. 밖이 춥지 않다고 해서 홀라당 반팔만 입고 나간 나한테 “반팔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나 안에도 긴팔이야.”하고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준 것도.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아도 네가 한 어떤 말들로 길에서 주저앉아서 큰 소리로 웃었던 거,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영업하시면 그 때 먹자!’고 했던 닭꼬치를 같이 먹었던 것도. ‘아주 매운 양념’을 뿌려 먹으면서 발을 동동 구르는 나를 보고는 차가 오는지 살피지도 않고 우유를 사러 헐레벌떡 편의점에 뛰어가는 뒷모습은 좀 위험한 바보 같았다. 편의점에서 돌아오는 길에 네 것까지 양손에 닭꼬치를 하나씩 들고 서 있는 걸 찍는 것도 웃겼다. 나중에 확인한 사진 속의 나는 닭꼬치에 환장한 얼빠진 대갈장군 같았다. 너보다 내가 더 바보 같았다. 책장에 꽂혀 있던 그림 작품집을 오랜만에 펼친 것도, 책장을 같이 넘긴 것도 좋았다. 오래 읽다 그만 둔 책, 사두고 펼친 적 없는 책들을 쌓아두고서 낭독 내기를 하는 것도 좋았다. 나중에 가서는 책 속 문장은 깡그리 무시한 채 프리스타일로 랩을 하는 게 많이 웃겼다. 한 켤레뿐인 욕실 신발을 신지 않는 이유를 물었을 때, “신으시라고.”하고 답했던 것은 조금 마음에 걸렸다. 다음날의 우중런도, 도중에 마주친 웃음이 호탕한 동네 아주머니도, 우산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근엄한 표정으로 검처럼 휘두르는 것도 웃겼다. “전에 만나던 사람한테 오늘 뭐 하느냐고 메시지 와 있었어.”하는 내 중얼거림에 “섹스 중!”이라고 되받아치는 것도, 쌀국수랑 반미를 먹으러 가자는 걸 “비엣남 가려면 여권 챙겨야겠다.”고 말하는 것도. 결항된 건 좀 아쉬웠다. 대신 패티가 두꺼운 수제버거는 좋았다. 네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드는 것도. 아, “존나 하고 싶었지?”하고 내가 너를 희롱할 때에 못 말린다는 얼굴을 하고 “어, 존나 박고 싶었어.”라거나, 아니면 웃으면서 내 머리채를 잡고 네 다리 사이를 기도록 하는 것도, 현관문 틈새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내 입 안에 손가락을 넣는 것도, 애태우려 일부러 천천히 움직이는 것도 존나 좋았다. “너랑 노는 거 재밌어.” 고작 내가 쥐어짤 수 있는 용기였다. 내키지 않는데도 거절할 수 없는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부단히도 떠보고, 밀었다가 당겨야만 했다.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될 수 있다고 그랬다. 대화로써도 해소할 수 없는 외로움은 어떻게 해야 좋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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