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쉐임> 중
난 5살 때 왼쪽 귀를 다쳤다. 그러나 난 내 청력에 문제가 있는 걸 인지하지 못했고 그렇게 5년을 보내고 10살이 되던 해에 왼쪽 귀에 중이염이 급속도로 악화되어서 수술하지 않으면 정말 죽을지 모른다는 의사의 말을 부모님 옆에서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어머니는 그때 그렇게 슬퍼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수술을 끝내고 제2의 인생의 계기가 된 내 10살 이후의 삶은 활발했던 내 성격을 소극적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항상 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20살이 되던 해, 병이 다시 도졌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섹스다. 사람은 원래 자기 핏줄을 남기고 싶어하니까. 내가 바로 다음날 죽는다면 당장 밖에 뛰쳐나가서 마음속으로 좋아하던 애를 강간하겠지. 그런데 이 생각은 나 말고도 모두가 하는 생각이 아닐까? 아- 아닐걸.
난 모두의 공감대를 쉽게 살 수 있는 글을 적으면서 좀더 나의 섹스 유토피아에 대해서 지껄여 보도록 하겠다. 몸이 아플 때면 난 세상의 법칙이라는 곳에서 잠시 벗어난듯한 느낌을 받는다. 내가 시한부 인생이라면 내일이 없는 걸 알고 있다면 굳이 내 욕구를 참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성공을 못할 인생이라면 차라리 쓰레기라고 세상에 인식되어도 좋으니, 난 그날 누군가를 강간할지도 모른다 그게 남들이 볼 때는 세계의 여러 성폭행범처럼 날 역사에 기록할지는 몰라도 원래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가 있지 않겠는가. 옛날엔 바위에 그림과 글을 새겼을지라도 지금은 컴퓨터로 그림과 글을 작성하니까. 다만 이러한 개념 때문에 섹스 또한 바뀌었다는 건, 인간의 욕구 또한 바뀌었다는 건 누구도 해명할 수가 없을 것이다.
사람은 몇 만년 전이나 지금이나 결국 섹스를 하니까 섹스는 영원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형태를 띄우든 그게 순수한 사랑이든 강간이든 인간을 포함한 여러 동물들의 가장 근본적인 생명 근원의 이유. 고로 내가 죽기 전에 누굴 강간한다고 해도 날 욕하는 건 단순히 그 시대에 있는 법과 규율이 날 욕한다는 것. 난 내가 섹스를 어떠한 형태로 하든 간에 그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 병이 날 죽음의 경계선에서 괴롭힐 때면 늘 이런 상상을 하곤 한다.
자기 합리화일수도 있겠지만 그 욕구를 참는다는 건 내가 인간을 초월하는 무엇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도 그녀가 생각난다. 아프다는 것은 섹스를 하고 싶다는 것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