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보통의 이십대들은 밋밋하고 고루한 대한민국의 고등교육을 버텨내고 나서야 비로소 스무 살이 되었다. 스무 살이 된 그들은 조금 더 넓은 세계를 맞이하며 그들에게 주어진 작은 자유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한다.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고 나면 그들은 책과 여행, 음악, 사랑 따위에 그들의 자유를 허용하며 행복해 한다. 드디어 온전히 나만을 위한, 나를 사랑하는 느낌을 발견한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한다.
SNS에 올라오는 유럽의 사진들에 ‘좋아요’를 누르고, 여행을 꿈꾸고, 자신의 가슴에 울림을 주는 좋은 글귀들을 듣고 또 한 권의 책에 도전한다. 때론 기타 하나를 덜컥 사서 몇 달 동안 손끝이 부르트도록 연습에 몰두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 ‘아름다운 사랑’의 뒤에 감추어져 분명 청춘들이 열광하지만 쉬이 남들 앞에 당당해지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으니 그건 ‘섹스’다.
섹스와 관련된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는 것을 점잖지 못하다거나 불경스럽다고까지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우습지만 그것은 용기까지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런 이야기를 자유롭게 해도 괜찮을까, 괜스레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털 사이트에 검색만 해도 나오는 수많은 섹스의 장점(면역력이 높아진다던가 하는)을 차치 하고서라도 우리는 섹스가 왜 좋은지, 왜 섹스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지,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어찌 풍요롭게 하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에세이 [사랑은 없다]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랑의 근원은 사실 에로스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족 번식의 본능을 좋게 포장한 것이 사랑이다.’ 따위의 그의 주장이 전부 틀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사랑과 섹스는 좋은 건데 다들 섹스는 쉬쉬 하다보니 더욱 음지로 숨게 되고 결국 섹스가 위험해져 버리는 사회의 분위기를 우리가 하는 자유롭고 용감한(?) 이야기를 통해 환기시키고 싶은 것이다.
‘떨리는 눈을 마주치고 손을 수줍게 잡아보고 구두로 둘 사이의 연애를 인정하고 두 달 후에 키스하고 또 두 달 후에 드디어 섹스를 하는 것’ 따위의 순서를 누가 정해놓았는지 묻고 싶다. 또 정확히 일치하진 않지만 암묵적으로 그 순서에 동의하고 연애의 과정과 아름다운 사랑을 남의 순서에 맞춰 살아가는, 나를 포함한 당신들에게 ‘이제는 그렇게 하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섹스는 사랑의 종착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사랑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합의된 관계에서 섹스는 결코 감춰야 하는 것이 아니다. 섹스를 일정한 기간 동안은 거부하는 것이 정숙함의 상징이 아니다.
위와 같은 이야기들을 읽어 내려가며 분명 당신들이 공감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아직은 부끄럽고 당당하지 못한 당신들을 위해, 당신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내가 용기를 내 계속 이렇게 글을 쓸 것이다. ‘나는 쓰고, 당신들은 읽고’의 과정이 우리의 대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내 경험을 이야기 할 수도 있고 당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날이 될 수도 있겠다. 그렇게 모인 우리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 정숙하며 텁텁한 사회의 분위기를 환기시켜 나갈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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