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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남자들은 왜 첫사랑을 잊지 못할까? - 영화 '파랑주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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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랑주의보>
 
1
 
장승포가 배경인 이 영화에는 아름다운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산호가 넘실거리는 바다 속과 흰 구름이 몽실몽실 떠 있는 파란 하늘, 눈부시게 빛나는 석양 등 여름날 풍경 3종 세트가 모두 들어있다. 여기에다 강한 비바람과 파도로 구성된 태풍 세트까지 덤으로 제공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 들어 있는 최고의 패키지는 뭐니 뭐니 해도 첫사랑 세트다. 첫사랑 ‘올 패키지 세트’라고 해야 할까? "쉽게 오지 않는 기회, 어렵게 마련한 구성"이라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만한 ‘첫사랑 스페셜’이 순수 멜로라는 장르의 법칙 그대로, 그리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첫사랑의 법칙 그대로 펼쳐진다.
 
영화는 남자 주인공 수호가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 십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날, 술에 불콰하게 취한 수호와 친구들은 방파제로 몰려가고 그들 중 하나가 바다를 향해 외친다. ‘수은아, 이 자식 아직 너를 잊지 못했다아아아.’
 
여기까지 보면 대부분 짐작할 수 있다. 이 영화가 앞으로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을 보여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스토리는 이렇다. 한 반에 다니면서도 서로 친하지 않았던 수호와 수은, 어느 여름방학 수호가 수영을 하다 발에 쥐가 나 바다 속에 가라앉게 되고 그걸 수은이 구해 주면서 두 사람은 인연을 트게 된다. 반짝반짝 윤이 나게 사랑을 닦아 나가던 중에 수호는 수은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결국 수은은 세상을 떠난다. 그야말로 온 세상 러브 스토리를 가장 단순한 구조로 압축시켜 놓은 이야기이다.
 
나는 이 영화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이하 <세상중심>)의 리메이크 영화라는 사실을 모르고 봤다. 알았으면 안 봤을 것이다. <세상중심>은 나름대로 재미있는 요소를 갖춘 영화이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너무 길었다. 오죽하면 여자 주인공이 얼른 죽었으면 좋겠다고 맘 속으로 빌기까지 했을까?
 
다행히 <파랑주의보>는 그 지나친 반복을 비교적 많이 쳐내긴 했지만 스토리의 지지부진함은 <세상중심>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그래도 오
래된 학창시절을 재생해 보는 맛은 제법 쏠쏠했다. 음악실에서 들려오던 ‘사월의 노래’나 아비규환인 매점 앞 풍경도 그랬지만 주인공들을 엮어주는 구실이 되는 ‘고로케’는 특히 그랬다.
 
매점에서 사먹는 야채 고로케의 맛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타이밍을 잘 맞춰 방금 나온 따뜻한 고로케를 집는 행운은 90도 이상의 뜨거운 물을 컵라면에 부을 수 있는 행운과 맞먹는다. 그 시절 고로케는 200원이었다. 200원이던 고로케 값이 800원이 되는 동안 우리에게는 어떤 일들이 있었던가?
 

 
 
 
2
 
여고 시절, 고로케를 사이좋게 나눠먹었던 친구 은영에겐 남자친구 병국이가 있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엔 남자친구 있는 애들이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하이틴 로맨스에 등장하는 ‘구리빛 피부에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가진 석유 재벌 2세’나 반짝반짝 연애통신, 총각 선생님, 교회 오빠 등에 여러 명의 여학생들이 우글우글 매달려 있는 형국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박복했던 시절이니 상대적으로 은영이는 잘 나가는 여학생이었다.
 
남자친구가 있으면 비유적으로만 잘 나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잘 ‘나가야’한다. 밤에 몰래 집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야자가 늦게 끝나던 시절, 은영이는 집에 돌아가 방에다 불을 켜고 라디오까지 틀어놓고는 병국이를 만나러 도둑고양이처럼 나가곤 했다. 그렇게 밤마다 만나 하릴없이 시내를 쏘다니다 보니 성적이 잘 나올 리 만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중간고사 성적표를 들고는 화단가에 앉아 울고 있는 은영을 보게 되었다. 당시 주제넘게 '노동법'을 내용도 파악 못하면서 읽고 있던 나는 은영에게 네가 앞으로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을 벌면서 살고 싶지 않다면 당장 병국이와 헤어지고 공부나 하라는 조언을 늘어놓았고, 성적표 효과 때문인지 아니면 병국이가 싫증난 탓인지, 어쨌든 은영은 며칠 뒤 병국에게 결별을 선언하게 된다.
 
그런데 결별 선언 다음날, 은영은 볼치기 하는 애처럼 한쪽 볼이 퉁퉁 부어서 학교에 왔다. 선생님께는 벌레에 쏘인 것 같다는 말로 둘러댔지만 우리에겐 진실을 털어놓았다. 병국이에게 맞았다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 입에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욕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침 튀기게 욕을 하면서도 나는 보았다. 은영의 얼굴에 떠 있는 염화보살의 미소를.
 
듣고 보니 그러했다. 병국에게 대학가서 만나자는 말을 꺼내자마자, 그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기 시작해 은영의 따귀를 서너 대 갈기고도 모자라 길거리 전화부스의 유리창 하나를 온통 박살내고는 피를 철철 흘리는 상황을 연출했다고 한다. 병국은 은영에게 결코 헤어질 수 없다고 말했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너와 헤어지느니 죽어버리겠다고 했다. 부들부들 떨고 있던 은영에게 병국은 마지막 한 마디를 날렸다.
 
“절대 보내줄 수 없다. 넌 내 첫 여자니까.”
 
직접 보진 못했지만 그 순간, 은영은 분명 온몸을 부르르 떨었으리라. ‘아, 드라마 같은 상황이 내게도 일어나다니!’ 하면서. 지금 같으면 얼른 폭행죄로 고소하고 접근금지 신청을 했겠지만 순진하던 은영은 그 드라마틱한 사랑을 받아 안고야 말았다. 그녀의 얼굴에 깃들인 염화미소의 실체는 진짜 사랑을 경험했다고 믿는 사람의 자만심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하이틴 로맨스나 읽는 너희 따위완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병국의 사랑에 감동하기 보다는 병국의 광기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가 날린 멘트의 유치함에 치를 떨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든 더 이상 내 조언은 먹혀들지 않았다.
 
 
3
 
물론 <파랑주의보>에 나오는 수호는 수은을 소유하기 위해 따귀를 날리거나 전화 부스를 부수는 따위의 활극을 벌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형식이 다를 뿐 실체는 비슷하다. 이 세계의 중심은 너고, 내가 태어난 이후 네가 없었던 날은 하루도 없었다고, 오직 너만을 사랑하고 너만을 위해 꿈을 꾸겠다는 등 여름날 장대비처럼 쏟아졌던 수호의 맹세는, 살짝만 변질되면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너와 헤어지느니 죽어버리겠다는 병국의 협박이 되기 십상이다.
 
첫사랑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은 눈에 뵈는 게 없다. 그들에겐 실패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앞서 이 영화가 ‘첫사랑 세트’라고 했었다. 첫사랑 세트답게 첫 키스, 둘만의 첫 여행, 영원하자는 약속, 슬픈 결말 등이 빠짐없이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첫사랑 세트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역시 ‘영원하자는 약속’으로 대변되는 ‘사랑에 대한 자신감 혹은 오만함’이다.
 
많은 이들(특히 남자들)이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걸핏하면 꺼내어 보는 것도 바로 그 자신감이 그리워서가 아닐까?
 
비록 돈도 없고 차도 없고 직업은 물론 더러는 내 방 조차도 없었지만, 그녀에 대한 내 감정 하나만큼은 우주의 똥꼬를 찌르고도 남을 만큼 기고만장했던 시절, 사는 일에는 뭐 하나 분명한 게 없어도 사랑만큼은 분명했던 시절, 그래서 십년이 지나도 백년이 지나도 이 사랑 변하지 않고 영원할 거라고 귓구멍에 속삭일 수 있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 대상이 아닌 상황에 대한 그리움이 우리를 이토록 첫사랑에 잡아 묶는 게 아닐까?
 

 


첫사랑이란 ‘사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감정에 대한 기억이라는 말이 있다.
 
수호나 수은처럼 한 시절에 깊이 각인되어 십년간 고향에도 못 가는 사람도 있고 첫사랑으로 인해 인생이 망가져 버린 사람, 그 후 다른 어떤 사람도 사랑하지 못한 사람도 있을 텐데, 왜 사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감히’ 말 하는 것일까?
 
그건 첫사랑 뒤에 이어지는 사랑들이 훨씬 스펙타클하고, 쫀쫀하고, 비루하고, 가혹하고, 깊을 수 있다는, 아니 대개 그러하다는 진실을 알려주기 위한 상대적 가치 평가가 아닐까 싶다. 감정의 클라이막스, 그것도 첫 공연 클라이막스에서 막을 내려 버린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다. 지지부진 이어지는 앵콜 공연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희열을 느낄 수 있는지 말이다.
 
<굿바이 솔로>라는 드라마에서도 그랬다.
 
“왜 사람들은 첫사랑만 중요하게 생각할까? 그래서 그 뒤에 이어지는 사랑을 평가절하 시킬까? 성숙해지고 현명해질 뿐인데...”
 

 
 

그렇다고 수호와 수은, 은영과 병국의 사랑을 평가절하 할 생각도 없다. 그 호시절에 그런 사랑도 못해보고 뜻도 모르는 노동법이나 읽었던 내가 한심할 뿐이다. 그런 그리움과 서투른 맹세와 순수한 자만심과 염화미소, 광기의 시간들은 우리의 인생을 반짝반짝하게 만들어 주니까.
 
다만 첫사랑에 대해 지나친 감정가를 매김으로 인해 지금 사랑을 초라하게 만들고, 지금 상대를 추하게 만들지는 말기를 바랄 뿐이다.
 
지나간 사랑에 붙들려 지금 사랑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파랑주의보>를 권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바다 속 장면처럼, 지나치게 아름다운 것들은 대개 ‘합성’이다.
남로당
대략 2001년 무렵 딴지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잉태.출산된 남녀불꽃로동당
http://burur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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