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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가을로 - 우리가 놓쳐버린 수많은 신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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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가을로]

친구 윤양이 정군과 사귀게 된 데에는 ‘공유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억’이 큰 몫을 차지했다. 그들은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위해 급히 준비된 소개팅에서 만났다. 소개팅 장소에 나가기 직전에 가진 윤양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크게 하자가 없는 남자라면 겨울 한 철을 춥지 않게 보내기 위해 잘해 볼 생각이라는 짧고 가는 의지를 보여 주었다. 기왕이면 혈액순환이 잘 되어 손발이 따뜻한 남자였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덧붙여.
 
그런데 막상 남자를 만나고 돌아온 윤양은 남자가 겨울 한철을 위한 시즌용 상대가 아니라 아무래도 운명의 남자가 될 것 같다는 예언을 발표했다. 하루 만에 어떻게 감히 운명을 운운하냐는 우리를 향해, 윤양이 들려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지역에서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낸 다음 스무 살 이후에도 5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두 사람이 어느 특정한 날,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1999년 12월 31일에 종각에 있었다거나 2002년 6월에 광화문에 있었다는 정도의 교집합이 아니었다.
 
그들은 2000년 크리스마스 날 정오에 모 대학의 도서관 3층 휴게실에 있었다. 정군은 취업준비를 하다 식후의 끽연을 즐기고 있었고, 윤양은 잃어버린 휴대폰을 돌려받기 위해 생전 처음 그 곳에 갔다고 한다. 2001년 크리스마스 오후엔 둘 다 성북구에 있는 모 까페에 있었다. 당시 잡지사에서 일했던 윤양은 시간이 안 맞아 할 수 없이 그 날로 잡은 인터뷰 때문에 퉁퉁 부은 얼굴로 까페의 문을 밀고 들어섰고, 정군은 당시에 사귀고 있던 여자친구와 창가 자리에 앉아 시시덕거리고 있었다고.
 
아무래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급조된 소개팅이다보니 자연스레 ‘작년 크리스마스엔 뭐하셨어요?’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고, 그 덕분에 중첩된 서로의 연대기를 발견하게 된 모양이다.
 
어쨌든 그들은 그렇게 2년에 걸쳐 같은 장소에서 크리스마스를 공유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만나야 할 사람은 꼭 만나게 된다는 영화 ‘접속’의 대사를 들먹이며 서로의 인연을 강조한 모양이다. 강조한 인연은 운명이 되었고, 운명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법이라 결국 그들은 운명의 처분대로 연인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따지면 몰라서 그렇지 어디 한 군데서 안 마주친 사람이 어디 있겠나 싶지만,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지 않는 이상, 혹은 단골 가게를 공유하지 않는 이상 하루 동안 마주치는 수천 명의 낯선 이들과 몇 달 뒤, 혹은 몇 년 뒤 다시 해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속담이 증명하듯, 서로가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공간에 머물기 위해서는 엄청난 운명의 자기장이 작용한다고 본다. 그 자기장의 힘으로 어떤 사람들은 연인이 되고 어떤 사람들은 친구가 되는 것이다.
 
 
 
영화 ‘가을로...’는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 함께 있었던 세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 역사의 치욕 베스트로 남을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에 그들이 있었다. 세진(엄지원)은 백화점 지하 까페의 아르바이트생이었고, 민주(김지수)는 백화점에 혼수를 보러 온 손님이었고, 현우(유지태)는 약혼녀인 민주를 만나기 위해 백화점을 향해 급히 걸어오고 있었다. 영화는 세 사람이 어떤 공간들을 공유해 가는지를 10년에 걸쳐 천천히 보여준다. 현우와 민주가 결혼해서 살게 될 아파트를 공유했다면 민주와 세진은 매몰된 사고 현장을 공유하고, 10년이 지난 뒤 세진과 현우는 민주가 기록한 여행지를 공유한다. 벤다이어그램은 한 칸씩 이동했지만 그들은 결국 하나의 상처를 공유하게 된다.
 
그것은 어처구니없이 커다란 운명의 자기장이었다. 몰라서 그렇지 먼 우주에서 지구를 들여다 보면, 엄청난 운명의 자기장들이 정신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걸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엔 그저 시시하게 오다가다 마주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몸이 감지하지 못하는 전파가 지지직거리고 있고, 엄청난 모스 부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것들이 인연을 만들고, 운명을 만들고 있을지 모른다.
 

영화 [가을로]

이제 진짜 하려던 이야기를 해야겠다.

현우는 여행지에서 계속 세진과 마주치게 되고 결국 그녀가 바로 사고 현장에서 민주의 마지막을 함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세진은 사고 이후 아무에게도 해 본 적 없다는 그날의 이야기를 현우에게 들려주고, 현우 역시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세진에게 털어놓는다.

그건 백화점이 무너진 날, 일 때문에 늦어질 것 같으니 백화점에 먼저 가 있으라는 현우에게 민주가 ‘여기서 기다리면 안 되냐고’ 두 번이나 말을 했다는 사실이다. 현우는 자책한다. 그녀가 그리로 보내지 말라고 손을 뻗었던 것인데, 그런 그녀를 자신이 억지로 사고 현장으로 보냈다고...
 
민주를 백화점으로 보낸 자기장의 세기가 ‘9’정도 된다면, 현우의 직장 앞에서 기다리려는 자기장의 세기는 ‘1’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1’을 감지해 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현우도 백화점에 먼저 가 있으라고 살짝 짜증을 냈고, 민주도 결국은 사고 현장으로 떠나고 말았다. 더 크게 잡아끄는 에너지를 향해 물체는 움직이기 마련이고, 우리는 보통 그런 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
 

영화 [가을로]
 
연애를 잘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향해 모든 촉수를 열어놓아야 한다고 들었다.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도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1’은 좀 어렵겠지만 적어도 ‘2’나 ‘3’정도 되는 자기장은 감지해야 한다고, 객관적으로는 ‘7’이나 ‘8’쪽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해도 그, 혹은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2’나 ‘3’을 향해서도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는 갑작스런 이별이라고 혹은 배신이라고 방방 뛰었던 일이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 그는 내게 sos 신호를 계속 보내오고 있었는데 내가 그걸 몰랐을 뿐이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지금 아프다고, 너에게서 마음이 떠나가고 있다고...표정과 말투 속에 섞여 있었던 ‘1’ 혹은 ‘2’정도 되는 미세한 신호들이 결국은 관계의 파국을 가져왔던 것이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던 날, 나는 초딩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러 갔다가 그 집 아이 엄마에게 뉴스를 전해 들었다. 내 친구는 그 날 저녁, 삼풍 백화점에 옷을 바꾸러 갈 계획이 있었지만 너무 졸려서 낮잠을 자 버린 바람에 불행을 피해갈 수 있었다. 버스를 놓친 바람에, 잠깐 뒤를 돌아보느라 파란불을 놓친 바람에, 그렇게 수많은 찰나의 이유들로 그 공간을, 그래서 불행을 피해 간 사람도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들을 잡아끈 그 미약한 자기장들은 제 역할을 톡톡히 해 내었다. 그것을 놓쳐서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사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은 운명일 뿐이다. 우리가 읽어내지 못한 모스 부호와 감지하지 못한 자기장은 그저 해독할 수 없는 운명의 뒷 패에 불과하다. 사고현장에서 살아남은 자는 그저 묵묵히 살아야 하고, 애인에게서 버려진 자는 다른 운명을 찾아 나서야 할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은 모두 자책한다. 미약한 운명의 신호를 읽어내지 못한 자신을 원망한다. 현우도 십년을 그렇게 살았다. 민주가 세진을 가을로, 그리고 여행지로 보낸 것은 어쩌면 현우의 오래된 짐을 벗게 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같은 사고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을 통해 모든 것은 그저 운명에 불과한 것임을, 결과에 순응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살아남은 자의 몫임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주에는 내장산 단풍 대신 코트 입고 가을 거리를 헤매기를 권유했으나, 이 영화를 보고 나니 관광지로 떠나는 ‘차표 한 장’을 권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운명이 보내오는 모든 신호를 제대로 읽지 못해 번번히 연애에 실패하는 자들은 가을이 한창인 곳으로 떠나서, 자연이 보내오는 신호라도 담뿍 받아 안고 오기를 바란다. 그래서 다음번엔 잘 되기를, 바란다.
 

영화 [가을로]
남로당
대략 2001년 무렵 딴지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잉태.출산된 남녀불꽃로동당
http://burur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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