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미친년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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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웰컴투동막골] 내 나이 스물다섯, 짝사랑하던 남자를 미행해 본 적이 있다.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려 뒤를 밟았다. 그는 내 얼굴을 대충만 알고 있었기에 그를 미행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하철 같은 칸에 올라 벼룩시장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가 어디서 내리는지 촉수를 세우고 있다가 대학로에서 냉큼 따라 내린 뒤 5미터 즈음 사이를 두고 따라갔다. 혜화동 로터리를 돌아 성큼성큼 걷던 그는 어느 건물 지하로 들어가 버렸다. 집은 아니고 어디 작업실로 추정되는 곳, 나는 갑자기 먹이감을 잃어버린 하이에나의 심정으로 그 건물 앞으로 잠시 서성거리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올 때 까지 기다릴까 싶어 길가 화단가에 벼룩신문을 깔고 주저앉았다. 어느새 해가 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내 앞을 총총 지나갔다. 그 와중에 살랑 살랑 불어오는 바람 탓인지 갑자기 졸음이 쏟아져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았나보다. 선잠이 깬 건 누군가 냅다 지른 고함 덕분이었다. “여기서 뭐해? 집에 안가고 여기서 뭐하는 거야?” 낯선 여자가 나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 여자 뭐지? 하고 눈 비비고 쳐다보니, 행색이나 표정이 좀 심상치 않다. 그러고 보니 여자의 가슴팍에 글자판이 대롱거리고 있다. 거기엔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렇다. 정신이 살짝 나간 사람인 것이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길가에 앉아 있는 낯선 사람에게 무작정 소리를 질러댈 리 없지. 자기도 제 힘으로 집을 못 찾는 주제에 길가에서 좀 존다고 그렇게 무안을 주다니….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맞아, 집에 안 가고 여기서 뭐하는 건가 싶어 나는 주섬주섬 일어나 그 골목을 벗어났다. 한참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여자는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진짜 집에 가나 안 가나 감시할 생각이었나 보다. 내 인생 최초이자 최후였던 미행은 그렇게 찐 맛없이 끝났지만, 그렇다고 짝사랑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이번엔 무엇으로 내 짝사랑 행각에 이벤트를 부여할까 고민하던 나는 괜찮은 아이디어 하나를 찾아냈다. 음악이었다. 그가 바흐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그의 삐삐 음성 메시지에 바흐의 음악들을 녹음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반주 첼로 조곡을 시작으로 다양한 레파토리의 바흐 곡들을 찾아 다녔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고학생의 신분이라 그 무렵 내게는 턴테이블도 시디 플레이어도 없이 달랑 라디오 달린 카세트 하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마저도 신형이 아니라 음질이 과히 좋지 않았다. 조용필이나 나훈아였다면 별 문제가 아니겠지만 그래도 바흐인데, 아무래도 음질에 대한 강박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억지로 꾸역꾸역 녹음을 하고 나름대로 흐믓 해 하던 중, 하루는 고요한 밤에 플레이 버튼을 마악 누르려던 찰나, 유난히 냉장고의 소음이 거슬리게 느껴졌다. 부엌이 너무 좁아 냉장고를 방안에 두고 살았는데, 그 놈의 냉장고가 그날따라 유난히 울어댔던 것이다. 고민할 것도 없이 냉장고 코드를 뽑고는 녹음을 시도했다. 고요한 방안에 울려퍼지던 바흐의 선율은, 무슨 곡이었는지 생각은 안 나지만 애절한 짝사랑을 싣고 서울이동통신사로 흘러들어 갔을 것이다. 그리고 이틀쯤 지났던가? 학교 갔다 늦게 돌아와 방문을 여니 방안에 물이 흥건하다. 그제서야 냉장고 코드를 빼놓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냉동고에 끼어있던 성에는 말끔하게 사라진 뒤였고, 그래서 한결 넓어진 냉동고안에는 눅눅하게 늘어진 돼지고기 반 근이 누워 있었다.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를 향해 맹목적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는 와중에 나의 세간은 누추하게 시들어 가는 구나…. 눅눅해진 돼지고기 반근이 일러주는 현실감에, 부끄럽고 슬펐더랬다. ㅣ짝사랑이 미친년을 만들다 그 짝사랑은 ‘누가 듣겠어요.’로 끝나게 되지만(아시죠?) 그 일로 인해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로 내가 미친년이 될 소지가 충분하다는 사실이다. 그건 내가 필요이상 행동하기 때문이었다. 그냥 마음속으로 좋아하다가, 술 한 잔 마시고 눈물 좀 짜다가, 그러다 고백하거나 접거나… 세월 따라 아련하게 잊혀지면 되는데, 이런 룰을 따라가면 되는데, 나는 지나치게 행동해 버렸다. 미행 한번과 음악 좀 보내기에서 끝난 게 아니다. 그의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가 그 동네를 무작정 헤매기도 하고, 음악회 티켓을 보내놓고는 콘서트홀 구석에서 왔나 안 왔나 찾느라 목 빠질 뻔 한 적도 있었다. 이제 와 ‘그때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해 한 행동들이다. 이렇게 해야 내 맘이 편하니까, 발바닥이 아프도록 낯선 동네를 헤매어도, 이렇게 하면 내가 진짜 사랑하고 아파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까, 이렇게 자기 학대와 자기 연민에 빠져들면서 사랑인지 진흙탕인지 모른 채 구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은 짝사랑일 때는 그냥 자기 학대에서 끝나지만, 주고받는 연애로 이어지면 상대도 위협하고 나도 위협하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 짝사랑을 접고 일년 쯤 지나 만난 남자와의 연애에서도 나의 미친년 기질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서로 좋을 때도 지나치게 행동했고, 마음이 식을 무렵에도 역시 지나치게 끝을 보려고 했다. 마음을 다 보여주지 못해도 그저 세월가면서 서서히 젖어드는 연애도 괜찮은 데, 이해가 안 되는 구석이 있어도 그러려니 하며 애틋하게 끝나는 이별도 괜찮은데, 그러질 못했다. 좋을 때는 천정을 치느라 목이 부러지고, 헤어질 때는 바닥을 파느라 허리가 굽었다. 그 새벽에 택시를 타고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한번 더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영화 [겁나는 여친의 완벽한 비밀] 겁나는 여친의 완벽한 비밀(원제 My Super Ex-Girlfriend)에 등장하는 제니(우마 서먼)도 꼭 나 같은 여자다. 고등학생 시절 우주에서 떨어진 운석을 만지게 되면서 초능력을 얻게 되어 뉴욕을 구하는 슈퍼 히어로 G-Girl로 살아가는 그녀지만, 남자 문제만큼은 젬병이다. 어느 날 우연히 제니는 가방을 소매치기를 당하고 그것을 건축가인 매트(루크 윌슨)가 찾아주게 되면서 두 사람은 연인이 되지만, 처음에는 뉴욕의 영웅인 제니를 자랑스러워하던 매트도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에게 지나치게 집착하고 피해의식이 심각한 제니를 부담스러워하게 된다. 급기야 제니에게 이별을 고하는 매트. 그러나 그는 그날부터 미친 제니의 피의 복수를 당하게 된다. 지붕에 구멍 뚫고 자동차를 우주에 날려 버리는 건 물론 침실에 상어까지 던져대니 도저히 살아갈 방도가 없다. 전 세계의 영웅이지만 애인 앞에서는 미친년으로 돌변해 버리는 그녀, 그녀 역시 지나친 행동주의자다. 사랑할 때는 자신의 비밀까지 전부 까발리고 하늘을 날며 섹스까지 즐기던 그녀가 남자가 ‘시간을 좀 갖자.’는 말에 발끈해 잡아 죽일 듯이 덤벼댄다. 악당을 물리치고 사고 현장에서 사람을 구하는 일이야 호불호(好不好)가 뚜렷한 일이지만, 연애는 그런 게 아니니까. 복잡 미묘한 감정을 잃고 그 안에서 인격을 다스려야 하니까. 몸으로 떼우는 일에만 능하고 정신으로 무장하는 것엔 약하다보니 변심한 애인과 제대로 헤어질 줄 몰랐던 것이다. 슈퍼맨의 가슴팍에 새겨진 S가 small size 의 약자인지도 모르는 것처럼, 타인에게 숨겨진 진정한 크기의 내공은 전혀 예측하기 힘든 영역이다. 영화 [겁나는 여친의 완벽한 비밀] 중요한 건, 미친년은 훈련에 의해 만들어 진다는 사실이다. DNA속에 어느 정도는 ‘지나친 행동주의’를 타고 나기도 하겠지만, 순간의 판단과 선택에 의해 조금씩 훈련되어져 활약하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단속을 잘해야 한다. 좋아하는 사람의 주소를 몰래 따고 싶거나, 애인의 이메일 비밀번호를 알고 싶어질 때, 비 오는 날 괜히 우산 없이 골목 앞에 서 있고 싶어질 때, 그때 손모가지를 비틀고 허벅지를 찔러 가며 참아야 하는 것이다. 미친 짓도 탄력을 받기 시작하면 더 제어가 안 되기 마련이다. 오래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애인을 기다린 적이 있다. 저만치, 기둥 네 개 너머에서 그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우다다 달려갔다. 그런데 기둥 세 개를 지날 무렵 나는 그가 나의 애인이 아니라 낯선 남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내 얼굴은 이미 입을 찢어가며 웃고 있었고 전속력으로 남자를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게? 나는 웃는 얼굴을 그대로 지은 채 달려가 남자를 지나쳐 버렸다. 멈출 수가 없어 계속 달려갔다. 그 남자가 ‘저 여자 왜 저러지?’하고 뒤를 돌아봤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계속 뛰어 세종문화회관을 아예 지나쳐 버렸으니까. 탄력이란 그런 것이다. 미친 짓도 한번 힘을 받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자기 힘으로 멈출 수 없게 된다.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계속 가게 된다. 그래서 무섭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나이가 들면 기력이 딸려서라도 미친년 생활을 철수하게 된다는 것. 거기다 세월이 실어다 준 깨달음이 있어, 지나치게 아는 것도 귀찮고, 지나치게 좋은 것도 무섭다. 오는 손님은 받고 가는 손님은 안 잡는 단골식당의 여유를 깨우치게 된다. 다만 세월이 지난 뒤 추억조차 없는 기록만 남기고 싶지 않다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인연만 만들어 놓고 싶지 않다면, 부디 오버하지 말고 무던하게 연애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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