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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누나라고 부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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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아마 충혈 된 눈을 들키기 싫어서일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해가 질랑 말랑 하고 있었다. 바람도 추울랑 말랑 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퇴근자들에게 밀려 걸으면서 이 영화가 왜 슬픈지에 관해 생각해 봤다. 이유야 뻔하다. 주인공 윤수가 너무 불쌍하기 때문이다. 지지리 복도 없는 한 남자의 짧고 여윈 인생에 대한 슬픔이다. 그리고 확정된 죽음 앞에서 짧지만 굵은 사랑을 나누는 그들을 향한 슬픔이다. 윤수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은 ‘사랑합니다... 누나’ 였다. 예고편에서 ‘사랑합니다.’ 까지는 봤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내내 이 말이 언제 나올지를 기다렸다. 원작을 읽지 못한 나로선 두 사람의 감정이 어디까지 가는지 얼마나 가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 말을 서로 마주본 채 나눌지, 윤수의 마음속에서 에코로만 울릴지도 궁금했다. 서로 나눈다면 유정은 뭐라고 대답 할지 그것도 궁금했다. 그런데 그것은 두 시간짜리 영화의 말미에서, 보자기를 뒤집어쓰기 직전에야 터져 나왔다. 그리고 예고편과는 달리 ‘누나’라는 부록을 달고 나왔다. 윤수는 왜 ‘사랑합니다.’ 뒤에 ‘누나’를 붙였던 걸까? 그들이 접견실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던 날, 나이키 운동화를 사 달라는 윤수에게 유정은 장난처럼 ‘계속 유정씨라고 부르네, 내가 누난데...’라는 말을 한다. 어쩌면 그 ‘누나’는 유정이 건넨 그 말에 대한 윤수의 뒤늦은 대답일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어머니께 버림받고 하나뿐인 동생까지 잃은 뒤, 세상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사람 하나 가지지 못한 자신에게 뒤늦게 생긴 ‘누나’- 그 존재를 마지막으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견이 있다. 그건 윤수가 유정에게 마지막으로 자신의 진심을, 아주 소중하고 행복한 진심을 전달한 다음, 세상에 남겨질 유정을 배려해 ‘누나’라는 말을 사족처럼 덧붙인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서로의 진심이 아무리 애틋하다 하더라도 거기 모인 사람들의 눈에 윤수는 형 집행을 앞둔 사형수에 불과하다. 윤수를 위해 그 자리에 유정을 불러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두 사람의 비밀을, 진심을 모두 헤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사랑합니다.’는 말이 가진 대중성과 보편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말은 뒤에 남겨질 유정에게 짐이 될 수도 있다. 적어도 타인들의 시선 안에서는 말이다. 그런 유정을 배려해 윤수는 누나라는 점 하나를 찍어준 것이 아닐까, 나는 그저 누나로서 저 사람을 사랑하는 것 뿐이거든요. 저 사람이랑 나랑 그렇고 그런 관계는 절대 아니거든요. 그저 나는 한없이 고맙고 감사할 뿐이거든요... 윤수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만 슬픈 것이 아니다. 세상의 편견 앞에서 평범한 남자와 여자로 마주 서지 못하는 관계, 누나라는 사족을 붙여야 하는 관계 역시 참으로 슬픈 것이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이렇게 남들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을 뿐더러, 영화의 주제와도 통 거리가 먼 단어 하나에 꼬투리를 잡고 누나냐 아니냐에 늘어지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녀관계의 모든 이면에는 ‘누나 혹은 오빠’가 들어 있다는 사실... 때론 전선 속의 구리처럼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을 때도 있지만 ‘딱’ 잘라보면 여지없이 보인다는 걸 말이다. ㅡ 대학 다닐 때 우리 과에 한 살 아래의 괜찮은 남자애가 한 놈 있었다. 성격 좋고 인물 좋아 남녀노소에게 인기가 높았는데, 하루는 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반은 장난으로 하지만 꽤 진지한 듯 느끼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누나라고 부르지 마...” 세월이 흘러흘러 모 휴대전화 광고에서 김태희의 목소리로 똑같은 말을 들었다. 김태희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현빈의 눈이 빛나던 것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오래전 그 녀석은 내 말을 들은 뒤부터는 아예 누님이라는 극존칭을 쓰면서 나를 경계했다. 녀석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누나를 누나라고 부르지 못하는 순간, 자신이 온 몸으로 떠 안아야 할 느끼한 부담감을. 재밌는 건 남자는 ‘오빠라고 불러...’라는 한 마디로 연애를 시작할 수 있고, 나이 많은 여자는 ‘누나라고 부르지 마...’로 연애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오빠는 불러야 좋고 누나는 부르지 않아야 좋은 걸까? 사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모든 관계의 배후에는 가족관계가 도사리고 있다. 호칭을 보면 모두 한 가족이다. 나이가 많으면 무조건 언니나 누나, 오빠나 형이요, 친구 부모님은 모두 아버님, 어머님이고, 더 나이 드신 분은 할아버지, 할머니시다. 하물며 아저씨와 아줌마라는 장거리 느낌의 호칭마저도 실은 6촌, 8촌 관계에서 온 것 아닌가... 연애는 새로운 가족의 파생이나 확장을 위한 전초기지의 역할을 한다. 흔히들 생각하는 연애의 가장 바람직한(?) 귀결은 결혼을 통해 가족관계를 맺는 것으로 끝난다. 여자들이 대부분 오빠 같은 남자와 사귀는 것은 군대와 취직, 임신 등의 변수로 인해 결혼 적령기가 그렇게 맞춰진 탓도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가족 형태로 자리 이동 할 것을 염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 집구석이든 가장 따뜻하고 보드라운 관계는 바로 ‘오빠와 여동생’이니까. 그런데 보드라운 것만 따지면 누나와 남동생의 관계도 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나는 이상적인 가족 형태로 자리 이동하지 못한 채 냉대를 당한다. 관계 자체는 이동해도 호칭만은 싸늘하게 버려졌다. 연상녀와 사귀는 사람은 많지만 그녀들을 누나라고 부르는 사람은 한명도 못 봤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ㅡ 예전엔 한 살이라도 나이 많은 남자와 사귀면 무조건 오빠라고 불러야 하는지 알았다. 그래서 ‘오빠, 오빠’하다보니 상대적으로 나는 자꾸 어려져 갈수록 투정, 알짱, 칭얼 같은 단어들과 친숙해졌다. 물론 이건 내가 미성숙하고 덜 발효된 인간이라 나타난 증상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관계가 계속 그런 분위기로 흘러갔다. 그런데 서른을 넘어서면서부터 오빠라고 부르는 게 어색해졌다. 서른 넘어 만난 남자에게는 한번도 오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호칭이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생각보다 이상한 힘을 지녔다. 상대가 나이가 많고 적고 와는 상관없이 내가 그를 오빠라고 부르느냐 누구 누구씨라고 부르느냐에 따라 우리의 대화방식과 그를 향한 의존도에 차이가 나타났다. 아마 이래서 가수 승기군도 누나를 향해 ‘너-라고 부르겠다고’ 그렇게 부르짖었나 보다. 오빠 권하는 사회에서 남녀 관계를 오래 유지하다 보면 평등하고 공평한 관계에 대한 개념이 약해질 수도 있다. 누구는 보살피고 누구는 의지하는 것에 의미를 과다 부여하게 되고 그것이 진짜 연애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물론 누군가를 한없이 보살펴 주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아가페적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의 본질과 연애의 형식을 오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마음으로 보살피고 돌봐주는 것과 매일 밥 사 주고 일일이 체크 들어가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니까.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영화 속에서 유정은 윤수에게 못난이 김밥도 만들어 주고, 바다 사진도 찍어서 가져다 준다. 윤수가 볼 수 없는 세상의 한 귀퉁이들을 전달해 준다. 액면은 꼭 면회 온 누이 같다. 그러나 유정은 윤수의 누이가 아니다. 그녀는 세상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을 윤수에게 말했다. 그들은 그저 여자와 남자였다. 앙코르와트의 신전 한 귀퉁이었고, 온 우주에서 유일하게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영혼과 영혼이었다. 그래서 나는 결론적으로 윤수가 외친 ‘누나’에 새로운 의미 부여를 하려고 한다. 그건 바로 윤수는 이 나라에서 연인을 누나라고 부른 몇 안 되는 남자들 중 하나라는 주장이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이 글은 연인끼리 ‘오빠’라는 호칭을 쓰지 말자고 쓴 글은 아니다. 단 오빠는 당연한데 누나는 안 되는 것에 대한 의구심 내지 당혹감을 밝히는 글 정도는 되겠다. 실제로 남녀 관계를 끌어가는 힘은 속에 내장된 권력 관계이다. 그것은 호칭이나 나이와 상관없이 더 사랑하는가 덜 사랑하는가로 판명될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는 언어에 지배당하며 살고 있기도 하다. 때때로 호칭이 평등하고 성숙한 관계를 방해할 수도 있고 익숙한 호칭마저도 한 사회의 거대한 편견일 수 있다. 딴 나라 사람들의 귀에 ‘누난 내 여자니까... 너 라고 부를께...’라는 이승기의 노래와 현영의 ‘누나의 꿈’은 어떻게 들릴까? 이 사회가 지닌 호칭들의 합의가, 하나의 코미디로 느껴지는 건 나 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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