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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요리] 애정만세(Vive L'amour) - 절대고독 주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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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Vive L'amour]

1
고등학교 시절 국어시간에 배운 시 중에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란 시가 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반복되는 하소서체로 암기가 쉽다는 것과 제목이 마침 가을의 기도라는 이유 등으로 인해 이 시는 코리안 시리즈가 시작될 시즌이 되면 이 땅의 소녀들과 국군장병들에 의해 여지없이 인용되곤 했다.

그러나 내가 이 시를 기억하고 있는 건 하소서체 때문이 아니라 시의 마지막 구절 때문이다.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국어시간, 선생님은 까마귀 아래다 파란 분필로 밑줄을 좌악 긋더니 이렇게 쓰셨다. 

'절대고독'

내 생애에서 절대 고독이란 말과 처음으로 마주선 순간이었다. 고독 중에서도 최고봉. 일반 고독은 명함도 못 내밀고 곱빼기 고독도 넘볼 수 없는 고독의 분수령. 그것이 바로 절대 고독이었다.

그런데 까마귀가 절대고독의 주인공이 된 데에는 약간의 오해가 작용했을 것 같다. 오가다 생각 없이 쉬어가려고 마른 나뭇가지 위에 앉았는데 하필이면 그 순간 시인의 눈에 목격된 탓에 본의 아니게 절대고독의 등좌를 차지하게 된 것 아닐까? 그 이후, 그 까마귀를 본 자는 없으나, 혹여 까마귀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저 고독하지 않거든요'하고 해명하고 다녔다 치더라도 별 소용은 없었을 것이다. 국어교과서 개정안이 발표된 뒤에도 오랫동안 까마귀는 절대고독의 대명사가 되어야 했으니까.

어쨌든 열일곱, 열여덟 나이에 절대고독 따위를 알 리가 없다. 그것은 그렇게 빨리, 쉽게 찾아 오는 게 아니니까. 그것은 인생의 쓴 맛은 물론 단맛까지 좀 안 다음에야 온다. 물론 예고편도 개막전도 없지만 어쨌든 오기는 온다. 피할 도리가 없다. 우리의 젊은 날을 지나간 절대고독의 순간들. 청춘을 통째로 복습하는 기분으로 그런 순간들을 다시 떠올려보는 건 어떨지.

2
매정하게 떠났던 남자가 있다. '너랑은 도저히 안 되겠다, 좋은 남자 만나라.' 이런 말로 대충 수습하며 떠나면서 나가는 길에 술값만 내면 끝까지 좋은 남자로 남을 거라 믿고 있는 남자. 그렇게 떠나놓고는 어느 늦은 밤, 술에 취해 여자를 찾아온다. '잘 지내니? 그냥 생각나서 와 봤다.' 그렇게 말해놓고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 꾸역꾸역 토해낸다. 무릎 나온 츄리닝 바지를 입었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컨텍트 렌즈는 찾아 끼고 뛰쳐나온 여자는 남자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됐냐고 울부짖는다. 돌아서서 여자를 와락 껴안는 남자, 껴안은 채 휘청거린다. 그런 남자를 부축한 채 여자는 골목을 나서고 당연하다는 듯 그들이 향하는 곳은 큰 길가 여관이다.
 
아침햇살 환하게 스며드는 여관방에서 깨어난 여자. 엎어져 잠들고 있는 남자의 등판을 쓸어주다 마침 잠이 깬 남자와 눈을 맞추며 웃는데... 그런데 남자 얼굴이 어제의 그 얼굴이 아니다. 물론 하드웨어는 같지만 소프트웨어가 다르다. 아니 잠자고 있는 사이 새로 포맷이 되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거다. 생뚱하고 낯선 표정으로 일어난 남자는 샤워도 안 하고 급하게 여관을 나선다. 아침이라도 먹고 가라는 여자에게 늦었다고 말하며 서둘러 걷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여자를 향해, 이 말은 꼭 해야겠다는 듯 한 마디 내던진다.

'어젠 내가 실수했다. 미안해.'

한대 맞은 여자는 할 말을 고르느라 잠시 아웃 포커스가 되는데 그 짧은 사이 남자는 택시를 잡아 타고 사라지고, 거리에 남겨진 여자는 쇼윈도에 비친 모습, 무릎 나온 츄리닝 바지를 입고 콘텍트 렌즈를 못 빼 핏발이 선 자신과 마주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삐질 삐질 운다. 이 풍경, 좀 익숙하지 않은가? 비록 집으로 찾아왔느냐 전화부터 걸려왔느냐가 틀리고 들어간 여관이 틀리고 아침에 남자가 내던진 말이 틀리고 택시를 탔는지 전철역으로 뛰어갔는지가 틀리다 하더라도, 그 정황만은 비슷하지 않은가? 꽤 많은 여인들이 겪었던 어느 아침의 풍경, 나는 그 풍경들을 '절대고독'이라고 부르고 싶다.

소개팅에 나온 여자가 있다. 눈 가에 살짝 드리운 다크써클에도 불구하고 투명하게 웃는 여자, 남자의 맘을 흔들었다. 이제 더는 사랑을 믿지 않겠다고 소주병 던지며 울부짖기도 했던 남자는 다시 가슴께가 뻐근해지는 걸 느낀다. 그래, 운명이 허락한다면 다시 한번 해 보는 거지. 맥주 오백cc에 안면 홍조 현상을 보이며 발그레 웃는 여자에게서 희망을 발견하지만, 그러나 다시 오백 추가!를 외치기 시작하면서 여자는 얼마 전 헤어진 남자 이야기를 슬슬 꺼내놓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소개팅 자리는 '실연녀의 고민상담소'로 변해 버린다. 결정적으로 남자를 상심케 한 것은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노력하던 와중에 울린 여자의 핸드폰. 헤어진 남자에게서 온 전화에 여자는 로또 복권이라도 맞은 듯 좋아하더니 남자를 남겨두고 낼름 달려가 버린 것이다. 물론 핸드백을 챙기며 이 말은 꼭 빼먹지 않았다.

'참 좋으신 분 같아요.'

그래, 늬들 잘 되나 두고 보자, 여자의 뒷통수에다 대고 몰래 감자를 먹이는 남자, 술값 계산하다 먹지도 못하고 내뺄 거면서 과일 안주는 왜 추가했냐고 또 울분에 휩싸이고... 택시를 잡으니 어라 할증이 붙어 버렸네. 전화할거면 좀 일찍 할 것이지 젠장. 그런데 이렇게 늦은 시각에 만난 두 사람은 뭘 할까? 안 봐도 비디오다. 어디서 멋진 밤을 보내겠구나, 생각해 보니 그런 멋진 밤을 보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고 울컥 사람의 살내음이 그리워져 창 밖으로 고갤 돌리니 스쳐가는 건 죄다 여관 불빛과 허리 껴안고 걷는 남녀들 뿐일 때, 그렇게 적당히 취하고 적당히 덜 취한 채 할증 붙은 택시를 타고 혼자 돌아가는 남자 역시 내 눈에는 영락없이 '절대고독'용이다. 

3
사람들은 사랑받은 기억이 없을 때 고독하다. 사랑을 아예 안 해 본 사람은 제외다. 그들에겐 그래도 희망이라도 있다. 언젠가는 그 무언가를 하게 되리란 희망 말이다. 그런데, 하긴 죽도록 했는데 사랑받은 기억은 없을 때, 사람들은 고독의 나락에 떨어진다. 모호한 것들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지 못한다. 모호한 감정과 모호했던 행위는 지나고 나면 그저 애매모호할 뿐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것들은 상처가 된다. 손바닥에 남아있는 정액 냄새와 카드 고지서에 적혀 있는 '딴지 모텔', 기억에 새겨진 너의 얼굴과 몸에 새겨진 너의 흔적들. 그렇게 사소하지만 구체적인 단서들은 난무하는데 당최 '사랑받은 기억'은 없을 때, 말로만 억지로 있다고 갖다 붙여봐도 마음으론 죄다 사기인 것만 같을 때, 무엇보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아니 어쩌면 영원히 사랑받지 못할 것만 같을 때, 사람들은 불현듯 자기 앞으로 날아온 까마귀와 마주서게 되는 것이다. 
 

 
4
<애정만세>를 처음 봤을 때도 나는 절대고독을 떠올렸다. 주인공 메이가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울음을 터트리는 앤딩씬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 영화의 인물들은 가엾을 정도로 고독해, 끌어안고 같이 울고 싶을 정도이다. 세 사람 모두에게서 고독의 살비듬들이 두서없이 떨어져 내리긴 했지만 그 중에서도 역시 최고봉이라 할 만한 이는 납골당을 파는 시아오강 아니었을까? 납골당을 팔러 다니는 직업자체가 곧 고독하기도 했지만 거기다 더해 그는 소심한 동성애자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아정이 메이와 뒹굴고 있는 침대 밑에 엎드린 채 숨죽여 눈물을 흘리는 게이 납골당 세일즈맨의 모습은, 세상의 어떤 고독도 쉽게 넘볼 수 없을 것처럼 정말 징한 장면이었다. 

입맛이 쓴 날, <애정만세>를 보고 나면 조금은 위로가 된다. 내 인생도 우울하긴 하지만 그래도 저들만 할까? 싶어진다. 
비록 옛날 애인이 섹스가 그리울 때만 전화를 걸어오고, 비록 소개팅에서 만난 여자들에게 매번 '좋은 분 같으세요'라는 말만 듣고, 비록 큰 맘 먹고 섹스파트너 구하러 채팅방 들어갔다 바로 강퇴 당하는 설움을 겪는다 하더라도, 그래도 벤치에 앉아 롱테이크로 울음을 터트리고 침대밑에 기어들어가 숨죽인 채 울음을 터트려야 하는 그들보다는 낫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아직 당신에게는 사랑을 믿고 그것에 기대려하는 순진한 감성이 남아 있다. '오직섹파', '항시불끈' 따위의 대화명을 달고 오늘밤 함께 불타오를 사람을 찾는다고 울부짖고 있어도, 숨길 수 없는 헐크의 짙은 쌍꺼풀처럼 당신 안에는 '네가 소중해'하고 말해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애틋함이 숨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부동산을 팔러 다니는 메이도 옷을 팔러 다니는 아정도, 그리고 납골당을 팔러 다니는 시아오강도 결국 자신들의 마음을 제대로 보여주고 for sale 하는데는 실패했기에, 그들은 도시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과 당신의 차이는 그것이다. 세 사람은 소통하는데 실패했지만 당신은 아직 소통하기 위해 프로필을 관리하며 뻐꾸기를 날려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오로지 몸의 고독을 해소하기 위함이 아니라 마음의 여백들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단 말이다.(너무 낭만투성인가?)

사랑받은 기억이 없다는 것이 중요한게 아닐 것이다. 사랑받을 기대를 포기했을 때, 사랑할 의지를 상실했을 때, 몸이 아니라 마음을 끌어안을 필요를 느끼지 못할 때 우리는 절대고독속으로 빠져들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그 영혼은 빈 나뭇가지위에 다다른 까마귀처럼 사람들에게 발견되어지며 어딘가에서 꺼억꺼억 울게 될 것이다. 코리안 시리즈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말이다. 
 
5
영화 속에서 세 사람은 대부분의 식사를 혼자서 해결한다. 그나마 아정과 시아오강이 남의 아파트에서 같이 나누는 음식은 인스턴트 식품들이다. 그들에게 먹는다는 건 ‘때운다’는 의미 뿐이었다. 혼자 먹는 식사는 고독을 위한 맞춤 비쥬얼이다. 최성수가 '혼자뿐인 식사는 이미 식어버렸네' 라고 노래한 것처럼 혼자 하는 식사는 언제나 식어있기 마련이다. 방금 팔팔 끓여 내 왔다 하더라도 그것은 놓이는 즉시 금새 식어 버린다. 절대고독의 포스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혼자 먹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메뉴로 국수를 골랐다. 국수의 장점은 '후루룩' 땡겨 올릴 때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퍼지기 전에 먹어야 하니 딴 생각 할 겨를이 없고, 무엇보다 좀 식어도 변함없이 맛있다. 


재료
소면, 국수용 육수, 계란 2개, 파, 김치 조금
 
이렇게 만드세요
1. 시중에 파는 국수용 육수를 한번 끓인 뒤 식힌다. (포장지의 지시를 따를 것)
2. 끓는 물에 소면을 넣고 팔팔 끓어오르면 찬물을 끼얹는다. 이것을 2번 정도 더 반복한 뒤 불을 끈다.
3. 찬물에 헹궈서 먹을 만큼 사리를 만들어 준다.
4. 계란은 엷게 부쳐 쓸고 파와 김치도 잘게 썰어둔다.
5. 그릇에 사리를 담고 육수를 붓고, 4를 올린다.
6. 입맛에 따라 양념장을 첨가한다.
 
tip
열무김치와 함께 먹으면 더 맛있다.
남로당
대략 2001년 무렵 딴지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잉태.출산된 남녀불꽃로동당
http://burur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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