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빈집>
그녀를 처음 만난 장소는 세차장이었다.
차를 맡기고 대기실에서 기다리는데 트렌치코트를 입고 고급스런 스카프를 한 채 앉아 있는 중년의 그녀가 의자에 앉아 철 지난 잡지를 보고 있었다. 다른 테이블에는 촌스런 금장식이 달려있는 검은색 두꺼운 뿔테 안경에 할인매장에서나 샀을 법한 골프웨어를 입은 반 양아치 아저씨가 얇은 담배와 라이터를 손으로 만지면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나는 앉을 자리도 마땅치 않아 가만히 뒷짐지고 열심히 세차를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도 이내 지겨웠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나란히 세차하는 장면을 보고 있었다. 심심한 마음에 물통 옆에 일회용 커피믹스를 발견하고는 종이컵에 커피를 따라 마시려는데, 괜시리 친절한 생각이 들어 그녀에게도 커피 한잔 하시겠냐고 물어봤다.
그녀는 오랜만에 한잔 마셔볼까 하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상냥하게 하며 커피를 받아 들었다. 때 마침 티비 뉴스에서는 군대에서 일어난 사고를 방송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얼마 전 입대한 작은 아들이 걱정이 된다면서 깊은 한숨을 쉬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세차장에 일하는 아주머니가 문을 삐쭉 열며 "사모님 이거 버리실 거에요? 라며, 비닐봉지에 든 양초꾸러미를 가리 켰다. 나는 버릴 거면 내게 달라고 하면서 여자친구가 요즘 양초공예를 배우는데 연습용으로 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녀는 남자친구가 참 자상해 여자친구에게 사랑 받겠다며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칭찬해 주었다.
그녀는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고, 차분한 말투와 고상하고 고고한데다 아침에 미용실에서 머리손질을 한듯한 고급스런 화장품냄새가 나는 매우 여성스럽고 단아해 보이는 여인이었다.
내 차 차례가 왔을 때 나는 일하는 아저씨에게 몇 가지 당부 말을 전하고는 실내 세차를 하기 위해 그녀의 차를 지나쳐 오는데 나도 모르게 유리창에 붙어 있는 전화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어? 익숙한 번호네? '
살펴 보니 그녀의 전화번호 중간 자리가 내 번호 끝자리와 똑 같았다. 나는 문열 열고 들어오며 "전화번호 중간이 내 핸드폰번호 뒷자리랑 똑 같네요..ㅎㅎ " 하며 웃으며 말하자. 그녀도 "어머 그래요?" 하며 신기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속으로 묘한 인연이란 생각이 들었다. 중간번호를 봐서 그런지 어렵지 않은 뒷자리도 자연스럽게 외워졌다. 그렇게 간단히 몇 마디 대화 후 인사를 정중히 하고는 그녀는 세차가 다 끝나 깔끔해진 중형차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당시 나는 2년 동안 장거리 연애를 하는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여자친구는 성격이 불 같은데다 성미도 매우 급해 매일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까 중년의 여인이 말한 대로 사랑을 많이 받는 남자친구는 아니었던 것이다.
세차를 마치고 운전을 하는데 자꾸만 그 전화번호 뒷자리가 입 속 에서 맴돌았다. 나는 차를 세우고 전화 번호를 저장 한 뒤, 그리고 바로 용기를 내서 전화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긴 신호가 간 뒤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통신사의 사무적인 멘트가 들려왔다. 체념을 하고 다시 운전대를 잡고 기어를 넣으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어디시죠?" 상냥하고 마치 젊은 여인인 듯한 맑은 목소리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전해 왔다.
"아...네....아까 세차장에서 봤던 동생입니다.."
"아........그런데 무슨 일로......"
약간은 당황 한 듯 한편으로는 냉정한 듯한 그녀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인상이 너무 좋으셔서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 정도로 친해지고 싶다고 전했다. 그녀는 "네...그러세요...ㅎㅎ" 하며 옅은 웃음 소리 같은 느낌을 전해 받았다.
그 이후로 나는 가끔 씩 그녀와 카톡으로 일상적인 대화를 하기도 하고, 언제 한번 커피나 한잔 하자고도 하여 일주일쯤 뒤엔가 다시 그녀를 커다란 공원이 보이는 커피숍에서 그녀를 만날 기회를 가졌다. 보라색 코트와 스카프가 잘 어울리는 옷차림에 여전히 고혹적인 매력이 풍기는 그런 중년의 여인이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점점 우리는 가까워 지고 있었다. 그녀는 나와 띠동갑이었으며, 아들 둘에 큰아들은 대학원에 다니고, 작은 아들은 얼마 전에 군대를 갔으며, 신랑은 공기업 임원이라고 전해 왔다. 아침에 수영을 마치고, 문화 센터 등을 다니며, 나름 건강도 챙기며 알차게 인생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보기엔 지루하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그 날 이후로 연락하는 횟수도 많아 지고 이따금씩 회사 근처에 왔다면서 점심도 같이 하기도 하고,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친해질 기회가 더욱 많아졌다. 그녀는 몇일씩 카톡에 답이 없다가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답장을 하기도 하고, 몇달을 그저 그렇게 지루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참 만에 다시 만날 기회가 있어서 차를 마시던 중에 나는 "혹시 애인 있어요?" 라며 작심한 듯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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