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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일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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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빅]
기다렸지만 은근히 또 오지 않기를 바랐던 새학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입학 전 소집일에 참석하여 주의사항을 들었고, 입학식에도 참석해 앞으로 나와 공부를 같이할 아이들의 얼굴도 볼 수 있었다. 나보다 많이 어린 아이들과 같이 입학한답시고 서있으니 내 스스로도 웃음이 나왔다.  
 
나는 앞으로의 학교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새 노트북과 새 필기구를 샀다-물론 대부분 공부 못하는 애들이 이럼-. 노트북은 학교에서 아예 수업에 필요하니 구입하라고 했었고, 친절하게 어떤 최소 어떤 스펙을 써야 하는 지도 알려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각자 노트북을 켜고 수업을 하는 시간도 꽤 많았고 또 내가 가지고 있던 노트북은 요구 스펙에 비해 떨어지는 구형이어서 좋든 싫든 반드시 구입해야 하는 게 맞았다.
 
그와 동시에 내 삶은 다시 치열해졌다. 이제 졸업을 하기 위해 공부를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부터는 일도 해서 돈도 벌어야 했다. 내가 있던 지역은 동경이나 오사카처럼 지하철 패스 하나로 구석구석 다닐 수 있는 동네가 아니었다. 센다이도 나름 대도시이긴 했지만 차가 없으면 이동에 굉장한 제약이 있었다. 당시에는 한국 면허증을 가지고 면허 센터에 가서 간단한 절차만 거치면 일본 면허증으로 발행이 가능했는데(물론 비자가 있어야 함) 나는 면허를 발급받고 나서 큰 맘 먹고 중고차를 한 대 구입했다. 대부분 장기로 있는 유학생들은 못해도 스쿠터 같은 것을 타고 다녔고, 차를 가지고 다니는 애들도 꽤 있었다. 나중에 일본의 다른 지역 유학생들과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 놀란다. ‘왜 차가 필요해?’ ‘그리고 유학생이 차를?’ 이런 반응이다. 뭐 중고차를 사기 위해서 발품 팔고 절차에 대해 알아보고 했던 나날들도 있었는데……말하자면 지루하게 길어지니 패스.
 
나는 입학 하자 마자 학교 업무센터에 가서 장학금 요강 자료를 챙겼다. 일본은 학교 내 장학금 뿐만 아니라 외부 단체에서 지원하는 장학금 제도도 엄청 많아서, 하나쯤은 얻어 걸리겠지 하는 심산이었다. 방금 입학한 주제에 장학금 정보지를 가져가다니 저 놈 저거 패기 보소? 라는 듯한 시선의 직원과 눈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섰다.
 
1학년 1학기 수업은 굉장히 널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 꼭 그렇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주 5일 등교를 해야만 하는 시간표였다. 중간중간 비어 버리는 공강 시간도 꽤 있었다. 나는 수업 스케쥴에 맞추어 내 일상 스케줄과 동선을 맞춰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름 열심히 짱구를 굴려 시간을 그냥 버리는 일이 없도록 플랜을 짰다. 3시간 이상의 공강시에는 미리 등록해 둔 스포츠 센터에 가서 운동을 하고 오고, 공강이 없는 날에는 아침에 가거나 혹은 학교가 끝나고 가기로 했다. 일본놈들하고 경쟁을 해야 하니까, 하루 2시간 이상 그날 수업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표도 넣었다. 문제는 아르바이트였다.
 
유학생들은 물론, 일본 학생들은 대부분 아르바이트를 학업과 병행한다. 대부분 학교가 끝난 저녁 타임대에 편의점, 식당, 페스트푸드점 등등에서 일을 했다. 나도 물론 그것들에 대해 알아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았던 특이한 알바들을 했다. 아마도 내 성격상, 그리고 당시 정황상 딱 근무 시프트가 정해져 있는 시급제 알바가 안 맞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지금 되돌아 기억해 보면, 내가 했던 알바들은 다음과 같았다.
 
1. 도로공사 안전요원
한국처럼 일본도 국도나 고속도로를 정비해야 할 때가 있다. 아스팔트가 깨졌거나, 땅이 고르지 않거나, 안에 있는 수도관 같은 것을 손 봐야 하거나 할 때 인데, 차들은 지나가야 하니까 그 차선을 막고 통제해야 한다. 하는 일은 그냥 반짝거리는 형광 유니폼 입고 경광봉 들고 서서 차 오면 막고 신호 떨어지면 경광봉 흔들어서 보내주고 뭐 그런 일이다. 조금 귀찮은 게 있다면 안전 교육을 계속 받아야 하고, 차를 일단 멈추고 다시 보내줄 때 운전자에게 90도로 인사도 해야 한다.- 안 하면 오사카 출신 반장 아저씨가 개 흥분함- . 이 알바의 특징은 고정급이라는 점인데, 무조건 하루에 만 엔(당시 한화 9만원)이었다. 그러니까 공사가 1시간 만에 끝나도 만 엔이고, 10시간이 걸려도 만 엔이다. 기본적으로 4~5시간 걸리는 편이니까 나쁘지 않는 알바였다. 그 쪽에서도 ‘등치가 커서 아주 잘 보이겠구만!’ 하면서 나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유니폼이 좀 작아서 불편했던 것은 비밀.
 
2. 한국 식당
50대 한국 이모님이 경영하는 식당(이라기보다 술집)이었는데, 테이블이 5개 정도 되는 작은 가게였다. 특이하게도 그 사장님은 알바를 거의 쓰지 않고 정말 힘들 때만 일용직 간지로 나를 불러서 썼는데, 그냥 서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방 가서 음식도 하고 청소도 하고 양파도 까고 마늘도 다지고 부침개 뒤집고 사장님 노트북에 한국 드라마 다운 받아 주고 사장님이 한게임 고스톱 치실 때 대신 전화 받아주는 등의 일도 했다. 그 사장님은 목소리가 걸걸하고 매일 진한 화장에 개량한복 같은 것을 입고 있었는데 그 사장님에게 꽂혀서 오는 단골 손님들도 꽤 많았고 한국 음식이 그리워 찾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사장님은 단골 손님이 오면 가게를 나에게 통으로 맡기고 자리에 아예 착석해서 엄청난 양의 맥주를 먹었는데, 손님들이랑 마시다가 취하면 주방에 있는 나를 불러서 물었다.
 
“너 한국에서 유도 선수 했었다고 했지?”
“아니요.”
“응 일해.”
 
잠시 후
 
“너가 의대 다닌다고 했었나?”
“아닌데요.”
“응 알았어.”
 
30분 후
 
“너 중국 여자랑 동거한다고 하지 않았나?”
“아닐걸요?”
“응 다시 주방 들어가.”
 
1시간 후(만취상태)
 
“너 근데…….예전에 대마……”
“마약한 적 없는데요.”
“응 퇴근해.”
 
뭐 이런 식이었다. 아직도 그 사장님이 왜 손님들과 있을 때마다 나를 불러서 한 번도 맞지 않는 질문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3. 과외 선생
거의 내 주수입원이라고 보면 되었는데, 내가 가르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본에 있는 한국인 대상으로 일본어 가르치기, 다른 하나는 일본인에게 한국어 가르치기. 전자의 경우에는 위에 있는 한국식당에서 일을 하다가 그 지역에 장기 파견 나온 한국 회사원들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비즈니스 일본어를 가르치게 된 것이 계기였다. 또 한국인들(주로 아주머니들) 커뮤니티에 빠삭한 식당 사장님이 여기저기 소개를 해줘서 쉽게 학생들을 구할 수 있었다. 일본인 상대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은 일본내에 있는 과외 중계사이트 및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리랜서 사이트를 이용하여 구했다.

특이한 케이스로는 일본인과 재혼한 아주머니들이 한국에 있던 자기 아이를 데려오는 경우들이 왕왕 있는데, 그 아이들을 일본 학교에 보내기 위해 일본어나 기초적인 과목들을 의뢰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 주 수입원인 동시에, 내가 본의 아니게 센다이 내에 있는 한국인 커뮤니티와 접촉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알바이기도 했다.
 
4. 통역/번역
추후에 일본에서의 내 사업 아이템이 되기도 하는 일인데, 어쨌든 초창기에는 가장 미미한 수입이었다. 이것 역시 2번에 언급한 사장님이 여기저기 소개를 많이 해줬는데, 주로 일본 사람과 재혼한 아주머니들의 의뢰가 많았다.

사실 일본에는 제 2의 인생을 위해 결혼하러 오는 한국 여성분들이 꽤 있었다. 물론 대부분 40대 이상의 재혼이 많은데, 웃긴 건 그 분들이 일본어를 잘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점이었다. 근데 어떻게 일본인과 결혼을 했지? 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또 얘기가 길어지니 나중에.

여하튼 그런 분들이 말도 안 통하는 일본 사람과 살다 보니 답답한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닐 것이고, 정말 의논이나 협의가 필요할 때 통역을 썼다. 말이 좋아 의논이나 협의지 부부싸움을 통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 생각해 봐도 웃긴데 부부가 싸우면 통역이 있다는 것도 잊은 건지 부부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조루 새끼 주제에 맨날 하려고만 하고 ! 나가서 하고 와 짐승 새끼야!”
 
위 대사는 실제 내가 통역한 말이다.
 
5. 쓰나미 잔해 정리

물론 입학당시에 했던 일은 아니고, 이건 조금 나중에 한 일이다. 내가 지금까지 해 봤던 일 중 가장 고소득의 가장 빡센 일이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내가 있던 동북 지역은 2011년 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가 덮쳤고, 그 잔해들은 여기저기 떠 내려가 그 잔해 만으로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그것을 분류하고, 치우고, 옮겨야 하는데 일본에서는 이 일을 가레키 라고 불렀다. 어쨌든 이 가레키는 정말 피똥 싸게 빡센 일이었는데, 수입만큼은 확실해서 일하려는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이 알바에는 조금 슬픈 사연이 있어서……이건 나중에 기회가 되면.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는 위와 같은 알바들을 스케쥴 중간중간에 중원을 누비는 박지성 같이 침투시키며 예전보다 두 배 바쁜 일상을 보내게 되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책상위에서 공부하다가 쓰러져 자기도 했다. 물론 주인공들처럼 상큼한 장면이 아니었을 뿐이다.
 
그래도 나름대로 일 공부 운동의 세 가지를 잘 병행해 가고 있었다.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비싼 헬스장 가격 때문에, 돈이 아까워서 아무리 힘들어도 기어서라도 출석했다. 졸려서 자다가 내 싸다구를 셀프로 날리고 운동을 간 적도 있었다. 1년을 앉아서 공부만 했으니, 건강을 위해서는 이제 운동해야 할 것 같아서 였다.
 
내가 다니던 그 곳은 꽤 대규모의 스포츠 센터였다. 4층 짜리 건물이었는데 건물 전체가 그 센터 건물이었다. 지하에는 수영장이 있었고, 1층은 헬스장 및 요가 등을 위한 공간이었으며 2층은 사우나 및 샤워시설, 락커룸 등이 있었다. 나는 주로 헬스를 하고 나서, 수영으로 마무리를 하고 집에 돌아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기 직원들 사이에는 내 얘기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항상 일정치 않은 시간대에 매일 나타나는 덩치 큰 한국인 이라서 눈에 띈 모양이다.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헬스장 옷을 입고 운동을 하다가 잠시 의자에 앉아 쉬고 있던 어느 날, 뚝뚝 떨어지는 땀을 닦으며 문득 옆을 바라본 나는, 헬스하는 공간 바로 옆에 요가 수업장이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물론, 덤벨 올리면서 크아크아 불끈불끈 하는 그 공간 바로 옆에 아무런 분리 없이 붙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요가룸이 따로 있었지만 창문을 통해 훤히 보이고 문이 있었지만 목소리도 잘 들릴 뿐이었다.
 
“오늘부터 수업을 맡게 된 사이토 마리노 라고 합니다. 그냥 마리라고 불러주세요!”
 
키가 작은 여자분 한 명이, 매트 위에 앉아 있는 학생들을 보며 배꼽인사를 하고 있었다. 학생들도 “잘 부탁합니다” 라고 인사를 했다. 사이토라고 밝힌 그녀는 160이 안되어 보이는 키에, 아주 마른 몸매의 여자였다. 목소리 톤이 높고 밝았으며, 검정색의 긴 머리를 위로 땋아 올렸다. 피부가 굉장히 하얗고, 전체적으로 작은 얼굴에 비해 눈이 굉장히 컸다.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로 학생들의 자세를 잡아주거나 시범을 보이거나 했는데, 다리 찢는 것을 무슨 손가락 브이 하듯이 자연스럽게 하는 것을 보고 감탄이 나왔다. 훗날 알게 되었는데, 그녀가 바로 내가 스포츠센터에 등록할 때 접수를 도와준 직원이었다.
 
굉장히 신기한 건, 그녀와 내가 너무나 자주 스포츠 센터에서 마주쳤다는 점이었다. 운동하러 가는 사람과 센터에서 일하는 사람이 마주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싶겠지만, 나는 정해진 시간에만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 날 때에 대중없이 가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녀 역시 계속 거기 상주하는 직원이 아니라 근무 시프트가 자주 변하는데, 내가 갈 때 10번 중 8번 정도는 그녀가 있었다.
 
아무튼 자주 마주치다 보니, 은연중에 설마 오늘도? 하는 마음에 그녀가 있는 지 무의식적으로 확인했다. 뭐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있기를 기대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우연이라는 것이 계속 반복이 되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오우! 회원님 살 좀 빠졌는데요?”
 
이제는 꽤 친해진 남자 인스트럭터(일본에서는 헬스장 코치를 트레이너라고 하지 않음) 가 쉬고 있는 나를 보며 말을 걸었다. 다들 ‘켄짱’이라고 불러서 나도 그냥 켄짱이라고 불렀는데, 이름이 정말 켄 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매일 빨간색 민소매티셔츠를 입고 불끈 불끈한 갑빠를 자랑하는, 굉장히 살갑고 친절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가끔 내가 ‘가슴 만져봐도 돼?’ 라고 물으며 손으로 주물주물 하는 모션을 취하면 정색하며 부끄러워 하는 것을 보는 맛이 일품이었다.
 
“그래? 내가 보기엔 그냥 그대로 인 것 같은데. 뭔가 살찐 곰에서 단단한 곰이 된 것 뿐인 듯”
“에이. 그거야 자기는 매일 자기 몸을 보니까 모르는 거죠. 자자 호흡 신경 써서 뱉으시고.”
 
쉬려고 했는데 와 가지고 운동을 시키는 그를 보며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요가실에서 보았던 그녀가 우리 근처로 오더니 켄짱에게 말했다.
 
“혹시 타올 새로 들어온 거 어디 있는 지 알아?”
“아. 그거 3층 비품실에 있어. “
“고마워.”
 
그녀는 나 에게도 살짝 눈인사를 하더니 총총히 사라졌다. 수업이 끝나서 인지, 그녀는 요가복 위로 스포츠센터 이름이 찍힌 점퍼 같은 것을 걸치고 있었다. 큰 사이즈의 점퍼와 대조적으로, 검정색의 딱 붙는 요가복 바지를 입고 뭔가 깡총 거리는 걸음으로 사라졌다.
 
“아  저 분도 여기 직원이셨구나.”
“네? 아……마리요? 우리 스탭이에요. 요가 가르쳐요. ”
“아하 그렇군.”
“맞다! 마리가 한국 되게 좋아하는데. 혹시 아세요?”
“내가 알 리가 없지.”
“아 혹시 마리가 회원님한테 먼저 말 걸지 않았을까 해서요. 자자. 다음운동 합시다.”
“좀 쉬고 해 이 마초맨 색기야.”
 
나는 투덜거리며 운동을 마쳤고, 그녀가 한국을 좋아하는 구나 하고 그냥 그렇게 가볍게 넘겼다. 그 이후에도 그녀를 운동하며 자주 마주쳤고, 마리노도 그것을 인지한 듯 나를 볼 때마다 반갑게 목례를 해주었지만 따로 이야기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그때 늘 바빴고, 그녀도 늘 일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두 달여 동안 자주 마주치는 우연에 대해 마음 속으로만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눈인사, 목례로만 서로를 대했고, 나는 대학교 안에도 시설이 매우 좋은 무료 GYM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결국 등록 기간이 끝나고 추가 등록을 하지 않아, 그 센터는 다시 가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몇 주나 지났을까. 나는 억지로 대학생활에 적응해 가려고 노력 중이었다. 적응이라 함은 사실 별 게 아니라, 대학교 수업을 알아듣는 것이 최고의 관건이었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것과 전공 수업을 알아듣는 것은 꽤 난이도 차이가 있었다. 게다가 가끔 사투리를 쓰는 교수가 있는데 표준어로 일본어를 배운 나에게는 굉장한 고역이었다. 아무튼 모르는 것은 찾아보고, 아는 것도 메모해 가며 수업이 끝나면 바로 그 날 그 날 할당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그 날은 일본 학생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날이었다. 그녀는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전공했는데, 특이하게도 연극에 꽂혀서 학교를 휴학하고 극단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다만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열망도 있고, 추후 복학했을 때 한국어를 까먹으면 졸업이 힘들어지니, 나에게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내가 어떤 언어를 하는 것과 그것을 남에게 전수하는 것은 엄밀히 다른 영역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농구와 축구처럼 아예 다른 분야인 것이다. 한국어가 모국어일 뿐 한 번도 가르쳐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가르치는 스킬이 아예 전무했던 당시의 나를 선생님이라고 열심히 공부해줬던 그녀가 참 고마운 존재였다.
 
그 날도 수업이 끝나고 우리는 헤어졌고 – 주로 카페에서 수업했다. – 나는 차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선생님! 죄송한데 운전 중이시죠?”
“네. 무슨 일이에요?”
“혹시 선생님이 제 책 가지고 계신가요?”
 
운전하면서 슬쩍 조수석을 보니, 우리가 교제로 쓰는 책이 두 권 놓여 있었다. 젠장. 내 것만 가져온 게 아니라 얼떨결에 학생 것까지 가지고 탄 모양이었다.
 
“아. 그럼 이거 어떡하지? 다음 수업에 가지고 갈게요.”
“아……그럼 단어 외우라고 한 숙제는 어떡하죠?”

그냥 하루 제껴……라고 하고 싶지만 학생이 공부를 한다는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사실 그리고……제가 그 책에다가 비상금을 끼워 놨 거든요.”
“그럼 지금 가지고 갈게요. 어디에요?”
“죄송해요 선생님. 저 근데 지금 연습실에 있어요. 오늘 외부 강사가 와서 수업 해주시는 날이라서……”
“아 그럼 수업 다 받고 나와요. 나도 저녁 먹고 천천히 그 앞으로 갈게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생각해보면 내가 띨띨하게 책을 챙겨왔는데 왜 그녀가 사과를 하는 지 모르겠다. 집에 들렀다 오기에도 애매해서, 그냥 근처 라멘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다시 차를 그녀의 극단 연습실 쪽으로 돌렸다. 초창기에는 아무도 없는 연습실에서 한국어 강의를 했었으니까 위치는 알고 있었다.
 
후두두둑!
 
달리는 차의 지붕 위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가 싶더니, 이내 예상치 못한 폭우가 쏟아붓기 시작했다. 일기 예보에 소나기 소식은 전혀 없었는데……얘 네 기상청도 가끔 이런 실수를 하는 구나.
 
나는 한 쪽에 있는 공터에 차를 세우고, 경박하게 움직이는 와이퍼 사이로 2층에 있는 그녀의 연습실을 응시했다. 불이 켜져 있는 2층의 창문으로, 사람들이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는 것이 빗물 사이로 보였다.
 
도대체 무슨 수업을 하나 해서 유심히 살펴보다가, 담배나 하나 피워야 겠다 하며 담배를 꺼내려던 나는 어? 하며 다시 눈을 크게 떴다.
 
문득, 얼핏 지나다니는 사람 사이로 매우 낯익은 얼굴이 얼핏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나에게 책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학생이 아니라, 정말 반복되는 우연으로 계속 마주쳤던 그녀였다.
 
“마리노……였나?”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 내고, 아니겠지 걔가 여기 왜 있어 하하하하 하고 있는데, 수업이 끝났는지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시 창문 너머의 사람들은 뒷정리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선생님!”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막 퍼붓는 빗속에서 그 학생이 내 차로 달려왔다. 나는 창문을 열어 책을 그녀에게 건냈고, 그녀는 목에 걸고 있던 수건으로 책을 감싸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차를 돌리려던 나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다시 세우고 차 밖으로 내렸다. 마침 내가 정차한 자리 옆에 건물의 처마 밑 공간이 있었고, 거기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내가 본 사람이 그녀가 맞나? 하는 마음에 빗 무리에 연기를 뿜으며, 힐끔힐끔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단원들이 우르르 건물을 빠져나가고, 건물의 불이 모두 꺼졌다. 입구 쪽 현관에만 비춰진 등 때문에, 떨어지는 비의 알갱이들이 선명하게 보였고, 그 보다 더 선명하게 그녀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아……”
 
나는 나도 모르게 움찔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그녀는,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작은 백팩을 매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비에 적잖이 당황을 한 모양인지 그녀는 휴대폰과 비가 내리는 밤 하늘을 번갈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말을 걸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녀인지를 확인했으니 가야 하는지 망설이고 있을 때쯤 그녀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어라?”
 
그녀가 나를 보며 처음 뱉은 말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목례를 했고, 그녀는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여기 단원일까? 연극배우랑 요가 강사로 투 잡을 뛰나?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뭔가 결심한 듯 내가 있던 처마 쪽으로 달려왔다. 총총총 뛰어오며 비가 얼굴에 맞자 살짝 얼굴을 찡그리면서.
 
“안녕하세요!”
 
그녀는 밝게 인사를 했다. 뭔가 어처구니 없는 그 상황에서 나도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이 근처에 사세요?”
“아니요. 그게……”
 
나는 카오리(한국어 과외학생 이름)의 한국어 선생이며 책을 가져다 주러 왔다 라고 이야기 했고 그녀는 놀랍다는 듯이 손뼉 까지 치며 웃었다.
 
“맞다. 요즘은 운동하러 안 오시던데?”
“아 제가 등록 기간이 끝나서요.”
“아아. 그러시구나!”
“아. 네. 그게 학교에 좋은 곳이 있는데……꼭 무료라 그런 건 아니고 아무튼……”
 
나는 무언가 횡설수설하며 말했지만, 그녀는 내게 아이컨택을 한 채로 내 이야기를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조금 어색한 기류가 흐를 때쯤, 그녀의 시선이 다시 비가 쏟아지는 밤하늘을 향했다. 갑작스럽게 내린 비에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는지 난감한 표정이었고, 더군다나 그녀는 하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나는 짐짓 머뭇거리며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밤하늘을 보았다가, 빗속에 주차되어 있는 내 차를 보았다가 하다가, 이내 그녀에게 말했다.
 
“뭐……비가 많이 오는 데 제가 태워다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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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186넓은어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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