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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다이어리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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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블랙의 사랑] 어째서인지, 평소라면 신나서 뛰쳐나갔을 그녀의 ‘만나자’라는 제안에 기쁨보다 불안함이 더 컸다. 연필로 복기한 내 편지의 내용들-하나같이 이불킥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 갬성 충만한 문구들-이 머리속에 떠오를 때마다 귀까지 붉게 물들어 버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톡에 즉답을 하지 못하고 끙끙 앓았다. 차트에 진입한 내 곡은 점점 순위가 위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음악인들이 정말 접하기 힘든 기회를 오랜 기다림 끝에 나는 잡은 것이었다. 하지만 왜 인지 하나도 신이 나질 않았다. -오늘 말하는 거야?- 나는 고민 끝에 그렇게 보냈다. 며칠 후에 만나자라고 하면, 아마 그 만남을 기다리는 며칠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만 같아서 였다. 리즈를 만나고, 그녀와 연락을 주고 받았던 그 순간부터, 나는 그녀와 멀어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야 마음이 덜 다치니까. 누군가는 아마 이런 나를 보며 병신이라고 놀릴 지도 모르겠지만, 연애에 익숙하지 않은 남자가 이별을 위해 세울 수 있는 대책은 오직 이것 뿐이다. 마음 속으로 이별통보를 받는 상상을 하고, 미리 마음을 다쳐보는 예방주사를 맞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오늘도 괜찮고. 나 오늘은 정시 퇴근할거야. 시간 돼?- 잠시 후 그녀에게서 온 톡이 무서웠다. 만나서 하려고 하는 말이 뭘까? 아마도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그런 말이겠지.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어. 내가 회사로 갈게.- -응!- 그녀는 그 짧은 답장을 끝으로 말이 없었다. 뭐 워낙 바쁜 그녀니까. 그리고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 지 감도 오지 않았다. ‘오늘 나 시원하게 걷어찰 거야?’ 라고 묻는 다면 아마 나는 정말 병신이겠지? 다행히 그 정도까지는 아닌가 보다. 나는 그녀를 만나러 갈 준비를 시작했다. 아마 이제 줄 일이 없을 지도 모르니까, 그녀를 생각하면서 준비했던 선물을 먼저 챙기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나는 얼마 전부터 오롯이 그녀를 위한 노래를 만들고 있던 중이었다. 물론, 가사를 쓰고 멋지게 노래를 녹음한 것이 완성본이겠지만, 어쩌면 그 때까지 우리의 관계가 이어질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게 마지막 선물이 되든 어쨌든, 리즈를 생각하면서 만든 선물이니까, 주인은 그녀다. 일부러 그 선물을 넣기 위해서 산 귀여운 디자인의 USB에 그것을 넣고, 옷장을 뒤져서 가장 최근에 산, 가장 깔끔한 옷을 입었다. 얼마전에 다듬은 머리를 왁스로 잘 정돈했다. 그냥 편함을 추구하던 기존의 옷들이 아닌, 누군가에게 예쁘고 멋있게 보이기 위해 산 옷들이 조금 내 모습에는 아직 어색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이 굉장히 빨리 갔다. 만약 그녀가 데이트를 하자고 한 거라면 도무지 가지 않는 시간에 한탄만 하고 있었을 텐데, 오늘은 준비를 하다보니 순식간에 그녀의 퇴근시간이 가까워 왔다.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나는 늘 약속시간 보다 훨씬 일찍 가고는 했는데, 오늘따라 이것저것 신경쓰느라 빠듯한 시간에 출발하고 말았다. 버스의 차창 밖으로 땅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어둠과, 그 어둠을 밀어내는 헤드라이트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뿌옇게 느껴지는 그 광경을 보며 나는 품 안에 있는 USB를 만지작 거렸다. 이미 익숙해져 버린 그녀의 회사로 가는 길은, 언제나 그렇듯이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퇴근을 하는 사람들과,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또 이미 만나서 손을 잡고 있는 연인들이 차례로 내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녀에게 꼭 고맙다는 말을 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 덕분에 삶의 낙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알게 되었고, 또 일생 동안 받지 못했던 음악적인 영감을 얻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아마도 절대 가질 수 없는 사람을 아주 잠시나마 가져보았으니까. 버스가 멈추고, 정류장에서 몇 번 길을 건너 그녀의 회사 앞에 도착했다. 나는 새삼스럽게 그 건물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눈에 새겼다. 처음 그녀의 다이어리를 가지고 덜덜 떨며 왔었던 그 날부터, 그녀의 회식, 그리고 갑자기 내가 찾아와서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던 그날. 또 최근에 있었던 그녀의 소개팅. 짧지만 강한 기억들이 건물 곳곳에 묻어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안녕?” 별안간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와의 일들을 떠올리고 있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 버려서 더욱 놀랐다. 나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안녕.” 리즈는 오늘도 예뻤다. 그래. 이건 굳이 말할 필요도 가치도 없다. 내 삶에 가장 찬란했던 순간은 리즈를 만난 그 순간이라고 해도, 절대 오바가 아닐 것 같았다. “밥 먹자.”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나는 평소처럼 우물쭈물 하지 않고, 그녀의 보폭에 맞추어 나란히 걸었다. 내 마음은 아는 지 모르는지, 그녀는 오늘 하루 있었던 일에 대해 내게 말했다. “오늘 미팅이 엄청 많았거든. 근데 신입 여자애가 미팅중에 졸더라고. 와 난 진짜 깜짝 놀랐어.” “야근을 해서 피곤한 게 아니었을까?” “걔는 칼퇴 하는 애야. 그래서 내가 한마디 했지. 졸면 안된다고.” 리즈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일에 있어서 프로페셔널한 사람일 거야 라고 추측한 내 예상이 맞는 듯했다. “한 번 쯤은 봐주지 그랬어.” “봐 줄 수 없어.” “왜?” “난 꼰대거든.” 푸핫.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꼰대라는 단어는 그녀와는 왠지 어울리지 않았다. 바지를 배까지 추켜 입은 중년 아저씨한테나 어울리는 말이지, 그녀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좀 의외네.” “뭐가?” “꼰대라는 게. 외국에서 살다가 와서 왠지 자유 분방한 사고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건 그거고. 여긴 한국이거든. 근데 난 내가 꼰대인 게 좋아. 일에 있어서 쓸 대 없이 쿨병 걸리는 거 싫거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늘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해도, 저 미소에는 정말 마음이 약해진다. 마음이 약해진다기 보다 얼어 붙는 다는 표현이 적합할지도. “그리고 말이지. 꼰대인 것은 잘못된 게 아니야. 자기가 꼰대인 줄 모르면 문제가 될 지 모르지만, 나는 꼰대인 걸 스스로 인지하는 꼰대거든.”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리즈를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녀의 선택과 신념을 믿을 뿐이다. “자 뭐 먹을까 근데?” “난 아무거나……괜찮은데.” “나 그런 대답 싫어해.” 리즈의 말에 나는 주변을 둘러 보았다. 역시 그녀는 우유부단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손을 뻗어 눈 앞에 보이는 수제 버거집을 가리켰다. “그럼 햄버거.” “음. 좋아. 나쁘지 않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 팔을 잡고 가게로 끌고 들어갔다. 우리는 적당한 셋트 메뉴를 시켰다. 물론 무엇을 시켰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켓을 벗고, 머리를 만지는 그녀의 모습을 보느라. “이 누나가 사줄게. 많이 먹어.” “내가 내고 싶은데.” “아니야. 내가 낼 거야.” 리즈는 단호하게 그렇게 말했다. 뭔가 고아원 보내기 전 마지막 자장면 같은 건가 하는 생각에, 그녀를 똑바로 볼 자신이 없어졌다. 미리 마음 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했던 이별 연습은 아무래도 소용이 없을 것만 같다. “안 궁금해?” “뭐가?” “내가 갑자기 만나자고 한 거.” 운을 띄우기 시작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음……이제 내 앞에 나타나지마 이런 말을 듣는 건 아닐까 생각하긴 했어.” 내 대답에, 리즈의 두 눈이 어이없음으로 물들었다. “어째서?” “아니 뭐……소개팅 관찰 사건에……술 먹고 찾아와서 편지에……” 내 입에 담기도 민망한 얘기들을 하면서 나는 그녀를 겨우 바라볼 수 있었다. 리즈는 손으로 턱을 괴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기는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니?” 리즈의 질문에 나는 잠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셋트메뉴에 포함된 음료가 나왔고, 그녀는 빨대로 탄산 음료를 한 모금 들이키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널 보면 그렇게 돼. 이상하게.” “난 자기가 자신감이 더 있었으면 좋겠어. 하고 싶은 말 하고, 하고 싶은 행동 하고. 당당하게.” “그럼 화는 풀린 거야?” “아니.” 그녀의 대답에 나는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에 움츠러 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그녀가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주 화가 많이 나. “ “미안해.” “왜 자기가 미안해. 나 한테 화가 나는 건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그녀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그녀의 머리칼과, 하얀 얼굴을 번갈아 보는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소개팅남 꽤 괜찮았어.” “응. 멋있더라.” “그래. 봤으니 알겠지.” 그 다음에 아주 잠시 정적이 흘렀다. 주문한 음식이 곧 나왔지만, 그녀는 포크로 사이드로 나온 감자튀김을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 “괜찮았어. 매너도 좋고, 잘 생겼어. 나한테 관심도 있어 보였어.” 단어 하나하나가 폐부를 쿡쿡 찌르는 것 같았지만 이내 괜찮은 척 하며, 담담한 척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도 눈 앞에 있는 음식이 넘어가지 않을 거 같다. “근데 즐겁지 않았어.” 리즈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왜?” “네 생각이 났거든. 그 사람이랑 같이 있는 내내.”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꼴딱꼴딱 숨만 쉬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또 내 마음을 흔들기만 할 거면 그만 두라고 하고 싶었다. 물론 마음만. “왜 그랬을까. 이상하게 기분이 별로였어. 그 남자에게 미안하기도 했어. 같이 있는 내내 네 생각을 했으니까. 그 생각이 떠오르는 나 한테 화가 났어.” “화……가 날 것 까지는 없잖아.” 내 말에 그녀는 피식 하고 웃었다. 드디어 앞에 있는 음식을 조금 먹는가 싶더니, 그녀가 또 말했다. “두번째로 화가 난 건.” “또 있어?” “응.” “뭔데?” “내가 나이도 어린 게 아닌데, 네가 술 취해서 주고 간 편지를 읽고 마음이 흔들렸다는 거지.” 나는 이번에는 진짜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예상과는 다르게 전개되는 그녀의 말에,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놀라움부터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존심이 상했어. 편지에 마음이 흔들려? 그래서 화가 났어.” 취중진담의 편지가 먹혔다는 기쁨 보다는,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설레어 가슴이 뛰었다. “물어볼 게 있어.” “뭔데?” “자기는 날 좋아한다고 하면서 왜 그렇게 늘 자신이 없어?” “아 그게……”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말고.” “알았어. 그냥……좋아하다 보니까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던 것 같고……” “또?” “잘 모르겠어.” “편지에서는 당당하게 고백하던데.” “내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마지막장 내용 뿐일 테니까. 그녀의 말에 당황스럽고 창피해졌다. 리즈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읽어줄까?” “아니.” “아주 그냥 내 여자가 되어라! 라고 상남자 스럽게 말하던데.” “……” 귀가 빨개지다 못해 뜨겁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나를 보며 리즈는 잡아 먹기 전 쥐를 앞발로 툭툭 건드리며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80년대도 아니고, 그런 러브 레터에 내가 넘어갈 줄이야.” “그……럼 그 말은……” 이번엔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고백을 받아준다고 해석해도 되는 건가? 머리속이 하얘지기 시작했다. “자기야. 한 마디만 할게.” 응! 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아 고개만 끄덕였다. “나도 똑 같은 사람이야. 특별한 존재가 아니란 말이야. 그러니까 날 좋아하는 마음만 변하지 말되, 자신 있는 모습으로 나를 대해줘. 자기 인생에서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잖아. 하루라도 젊을 때 당당하게 하고 싶은 말 하고, 내 눈치도 보지 말고.” “알겠어.” 겨우 짜내듯 대답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웃음을 짓던 리즈가 내게 말했다. “하지만 적당히 나 보고 어는 모습도 보여줘. 갑자기 너무 당당하면 좀 섭섭할 것 같기도 하네.” 그녀의 미소에, 정말 천하를 얻은 것처럼 가슴이 벅차 올랐다. 당장이라도 리즈를 끌어 안고 싶었다.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테이블을 던져 버리고. “난 사실.” 가슴이 뛰니까 목소리도 떨렸다. 그제서야 식사를 시작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오늘 백프로 차인다고 생각했어.” “으이그.” “그냥 좀 리즈가 화가 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이제는 날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러게. 그래야 정상인데……나도 모르겠어.” “그래서 사실 아직 녹음은 못했지만 너 생각하면서 만든 음악도 가져오고……오늘 아니면 못 줄 거 같아서 막……”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는 나를 보며 리즈가 웃었다. 손을 뻗어 귀엽다는 듯 내 볼을 만졌다. 이미 빨개지다 못해 뜨거워진 피부 위로 조금은 차가운 손의 감촉이 느껴지자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빨리 먹어.” “밥이 안 들어갈 것 같아.” “왜?” “차이는 줄 알았는데 고백을 받았더니 너무 기분이 좋아서.” “뭐야. 내가 고백을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아니야?” 내 말에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과,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한 표정이 공존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 맞아. 고백이야. 너 나랑 사귈래?” 자신이 하는 말이 내 마음을 쥐고 흔든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 그녀는 요물이니까 아마 알고 있을 거야.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황홀함에 취해 있는 걸 보더니 그녀가 말했다. “왜 대답 안 해? 무릎 꿇고 고백해?” “아, 아냐!” “그래서 대답은?” “고맙습니다!” 내 말에 리즈는 웃어버렸다. 내가 가지기엔 너무나 아깝고 벅찬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늘 손에 잡히지 않는 곳에 날아다니고 있다고 느낀 그녀가 너무나 가까운 거리로 내 품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게 꿈은 아닐까. 꿈이라면 깨지 않거나, 영원히 같은 꿈을 꾸고 싶다. 그리고 벅찬 마음에 젖어 붕 떠있는 나를 보며 그녀가 말했다. “얼른 먹고 섹스하러 가자.” 13화 보기(클릭) 글쓴이 카린토 원문보기(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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