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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워커를 노동자로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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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랑도 흥정이 되나요?>
ㅣ성매매, 그 오래된 논쟁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뛰어들어, 엄청난 양의 말들을 쏟아내며, 피를 튀기고 싸웠던(실은 계속해서 싸우고 있는) 성매매라는 주제에 대하여 한 마디를 보탠다는 것은 엄청나게 새삼스러운 일이다. 그 새삼스러움을 무릅쓰고 결국 한마디를 보태게 된 것은, 이것이 이 칼럼의 주제인 Sex, Gender, Sexuality를 언급할 때 절대로 피해 갈 수 없는 문제이자, 이 세 가지 주제들의 복잡한 양상들, 첨예한 대립들, 그리고 난해한 모순들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구 상에 페미니즘이 등장한 이후, 페미니즘은 성매매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견해를 띄었다. 조금 더 강하게 이야기 한다면, 이른바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이라 불리는 3세대 페미니즘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페미니즘은 ‘성매매 근절’을 주요 과업 중 하나로 삼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기존의 체제를 지지하며, 이들에 맞서 성매매 찬성을 외치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의 주장은 크게 세 가지인데, 이른바 자유시장경제의 원칙에 따라서 자신이 원하고, 수요가 있다면 성매매를 못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과, 남자들의 성욕 해소를 위해서는 성매매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 이것과 맞닿아있는 측면에서 성매매는 사회의 ‘하수구’와 같은 역할을 통해 ‘일반 여성’에 대한(우리의 딸과 아내들과 애인들에 대한) 성범죄율을 낮출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 두 입장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한 대립을 유지해갔다. 그러나 성매매를 찬성하는 이들(주로 구매자의 위치에 있는)에게 3류 문학에서나 나올 법한 낭만적인 인식을 제외하면, 성매매 여성에 대해 이해하려는 시도를 찾아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과거 법전에까지 통용되었던 ‘윤락’이라는 단어에서도 보듯이 이들은 성매매 여성을 ‘개인적 타락’에 빠진 이들로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편 기존의 페미니즘의 시각은 이들을 구제해야할 피해자로, 혹은 가부장제에 의해 주입된 허위의식에 빠진 사람들로 보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향하지 않는 이들, 예컨대 성매매 특별법 이후 거리로 쏟아져 나온 성매매 여성들은 페미니즘 진영을 엄청나게 당황하게 했고, ‘포주개입론’에서부터(물론 포주나 외부 세력의 개입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여성부 장관의 ‘스톡홀롬 신드롬’발언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이 상반되는 두 입장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것은 ‘하나인 여성’이다. 한 쪽에서는 그 지긋지긋한 도식에 따라 여성들을 어머니와 창녀로, 혹은 두 가지 모두를 갖추고 있는 ‘아내’로 환원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동일한 젠더적 억압 하에 놓여있는 여성들이 등장해 그 이름으로 여성들이 놓여있는 각기 다른 상황을 모두 젠더로 환원한다. 하지만 정작 이 속에서 그 직접적인 당사자들인 성 판매 여성의 목소리는 행방이 묘연했다. 간혹 성매매 찬성 혹은 반대 진영에서 채택하는 성 판매 여성들의 수기 같은 것들은 명백하게 양 진영의 이해관계에 맞아 떨어지는 발언들뿐이었다. ㅣUnited Sexworker! 섹스워커 개념은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다. 가부장제의 억압적인 시선과 기존 페미니즘의 피해자화를 모두 거부하고, ‘성노동자’라는 정체성을 선언함으로서,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며, ‘주체’로서 말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나아가 성노동자를 ‘성 전문가’나, ‘성 치유사’라는 개념으로 표현하여, 적극성을 더욱더 부각시키는 일련의 움직임을 낳기도 했다. 표면적으로만 보았을 때 이들의 이해관계는 성매매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맞닿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성매매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성매매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에 반대한다. 이렇게 보면 성매매 찬성론자들이 주장하는 사회의 ‘하수구’같은 표현들 역시 전혀 동의할 수 없는 것임에는 마찬가지이다. 한편 이들의 목소리는 무엇보다도 급진주의(아주 간략하게 말해 여성을 억압받는 하나의 성적 계급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로 대표되는 기존의 페미니즘을 뒤흔들어 놓았다. 여성은 절대적이고, 항구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며, 각자가 놓여있는 상황에 따라서 여성과 남성만큼이나 다른 차이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무시하려들 때에는 가부장제가 행사하는 폭력만큼이나 다양한 정체성들을 침묵으로 몰고 간다는 것은,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과 대안모색뿐 아니라, 차이에 대해서도 민감한 촉수들을 뻗는 새로운 운동방식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섹스워커 개념에도 지뢰밭은 존재한다. 우선적으로 그 목소리가 성매매 찬성론자들에 의해 전유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유는 성노동자 개념의 본질을 무시하고, 그것이 ‘성 구매의 권리’를 영속화 할 수 있다는 점만을 본다. 이는 지금의 여러 가지 문제들, 특히 성노동자들에게 쏟아지는 이른바 ‘그런 여자’(남자는 성 판매를 해도 이러한 시선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라는 시선에 대하여 변화는커녕 고착화를 야기하는 것에 가깝다. 이 시선은 ‘나만 떳떳하면 되는’문제로 보기에는 성노동자를 둘러싼 사회적인 문제들의 직, 간접적인 원인이 될 만큼 중요하다. 또한 성노동이 가부장제적인 요소들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인가 역시 어려운 문제다. 물론 ‘프롤레타리아 계급 여성이 중산층 여성의 정치적 이상을 위해 생존권을 포기할 수 없’지만, 삶의 수준을 ‘생존권’의 차원에서 다투도록 만들고 있는 가부장적-자본주의를 위해 봉사하는 것 역시 성노동자들의 권익에 합치하는 일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ㅣ타자화의 순환 고리 섹스워커는 차이의 문제를 제기했다. 이는 성노동자와 페미니스트의 차이뿐만 아니라, 성노동자 내부의 새털만큼이나 많은 차이들도 포함해서이다. 이대입구의 어느 횡단보도 앞에 밤마다 세워지는 '여대생DDR'풍선과, 지금은 사라졌지만 집창촌의 붉은 등불은 엄청나게 다른 상황에 놓여있다. 섹스워커는 말 그대로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성 판매 여성들의 구제에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성노동자들을 억압과 착취 아래 놓여있는 피해자로 보는 것에 반대할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피해자화에 반대하면서,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페미니스트들을 타자화하는 것은 성매매의 문제를 전혀 쌩뚱맞은 대결 구도로 몰고 가는 상황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예전에 ‘양성평등연대’라는 단체의 이름으로 진보네트워크에 올라왔던 성 판매 여성의 수기(아마도 성매매 찬성의 입장을 담지 하는)에서는 ‘그년들(페미니스트)이야말로 진짜 창녀’라는 대화가 오고갔다. 양성평등과 성매매 찬성이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성매매의 문제가 누가누가 진짜 창녀인가를 가려내는 사우스파크에나 나올 법한 것은(패리스 힐튼이 등장하는 에피소드에서 이른바 창녀대결을 벌인다)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가부장제의 권세가 지속되는 한, 성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열악한 환경은 변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반대로 터져 나오는 차이의 문제에 대처할 방도를 찾지 못한다면, 페미니즘의 미래 역시 어둡다. 그렇다면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은 너무나도 진부하지만, 이해와 연대 가능성의 모색이다. ps. 영화 <씬시티>에 두 번째 에피소드를 보면 어쩌면 이상적(?)일지도 모르는 성노동자들의 공동체가 나온다. 궁금하면 한번 보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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