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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성교육 이대로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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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ㅣ여러분 그거하면 X됩니다! 이미 아득한 일이지만 어렸을 때 ‘성교육’을 받은 기억을 한번 되살려 보자. 내가 갖고 있는 기억 몇 가지는 음낭, 고환, 질, 자궁 등의 의학용어와 해부도로 대표되는 성행위에 대한 묘사들, 피임의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 설명하면서 실패할 가능성을 계속해서 강조하던 설명법이다. 게다가 남녀합반인 학교에서 성교육을 한다고 해놓고, 남자애들은 밖에 나가 놀라며 쌩뚱맞은 ‘자유시간’을 주었다. 한국의 성교육이 온통 정신을 쏟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들이 '그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거나, 적어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 전략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더욱 세련되지긴 했지만 기본적인 기조는 눈꼽만큼도 변하지 않았다. 이건 성적인 실천들을 19세 이상의 어른, 더 정확하게는 결혼한 부부의 침실 안으로 가둬놓기 위한 시도이다. 그러나 2차 성징이 나날이 빨라지는 요즘 시대에 언제까지 만19세 이상이라는 나이에 성을 가둬 놓을 수 있을까? 오늘은 예전의 추억을 곱씹으며 교과서와, 성교육 서적들에 대한 분석을 해보려 한다. ㅣ고등학교 시민윤리 속의 성 고등학교 시민윤리에는 ‘성, 약물 문제와 윤리’라는 단원에서 성에 관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여기에 나오는 글 중에는 무려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글까지 실려 있다. 하지만 제목에서도 보듯, 성의 문제는 여전히 약물 중독의 문제와 같은 수준에서 다루어진다. 더불어 성적 쾌락의 추구가 마약에 대한 욕구로 나아간다는 괴상망측한 설명이 되어 있다. 이 단원의 실질적 목적은 성 윤리에 대하여, 사랑-성-결혼이라는 세 가지의 강한 연계 축을 명시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이 단원에서는 여성주의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지는데, 굉장히 애매모호한 문장으로 여성해방주의는 “사랑이 없어도 자발적인 동의만 있으면 동성애, 성 매매, 근친상간 등 어떤 유형의 성관계도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라는 식으로 기술된다. 이러한 주장을 펴는 자유주의 성 윤리는 온건주의와 급진주의의 두 부류로 구분된다. 온건한 자유주의자들은 서로 사랑한다는 전제 조건하에서 자발적인 동의를 도덕적인 성 관계의 조건으로 보는 입장인데 비해, 급진적인 자유주의자는 사랑이 없어도 자발적인 동의만 있으면, 동성애, 성 매매, 근친상간 등 어떤 유형의 성관계도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과서는 “사랑이 배제된 상태의 성적 결합은 인격적 행위로 평가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물론 어느 페미니즘이 성 매매와 근친상간의 도덕적 타당성을 주장했는지는 모르겠지만,(섹스워커 논의는 비교적 최신의 것으로 교과서에서 언급되고 있지 않다) 결국 이것은 여성주의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으로 보여진다. 또한 양성평등에 관해서도 매우 일반론적인 시각을 답습하고 있으며, 한국 사회의 성적 불평등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한다’라는 당위로 가득찬 문장들로 채워져 있다. 즉 고등학교 시민윤리는 여성주의를 성적인 문란함을 조장하는 존재로 인식, 기술하고 있으며, 양성평등의 현실적 지표나 갈등의 지점들을 지적하고 있다기보다는 녹음기적 수준의 기술로 일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런 문제들을 성 윤리, 약물 남용의 문제에 끼워 넣음으로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임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는 가부장적 성차별 구조의 외면과 은폐의 시도로 볼 수 있다. 이것은 교과서가 인용하고 있는 다음의 문장에 따라서 잘 드러나는데 “여성을 소중히 지킬 수 없는 남자는 여성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 - 괴테"라는 말은 양성평등을 남성 주체가 여성 객체에게 베푸는 일종의 은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ㅣ성교육 교재 속의 성 한국에서 쓰여지는 성교육 도서들은 대체로 성-사랑-결혼에 대하여 강한 연속성을 부여한다. 이와 같은 인식은 1920년대에 서양에서 일어난 1차 성 혁명에 기반하여 등장한 것으로, 과거 금욕적이고 헌신적인 빅토리아적 가족에서 애정에 의해 결합되는 ‘연애 결혼’의 제도화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고등학교 시민윤리가 주장하는 공식적인 입장이기도 하며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성 담론이다. 이러한 담론은 성을 부부의 침실이라는 유일한 공간으로 한정시키며 결혼 이전의 성적 욕망들은 불완전한 것, 위험한 것 등의 도덕적 성 과학적인 가치 판단을 내림으로써 유보시키는 전략을 통해 성을 통제하려 한다. 혼전순결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청소년 성 보고서』는 청소년들이 직접 집필한 수기들로 이루어진 책이다. 엮은이는 “올바른 성교육은 순결 가치관에 기초해 행복한 가정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이루어져야 합니다.”라는 말을 통해 이 책의 논조를 함축적으로 제시한다. 이 책이 주장하고 있는 순결 이데올로기는 과거에는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적용되던 가부장제적 억압이었으나 전략의 세련화와 기독교적 금욕주의, 가족 이데올로기등과의 결합을 통해 남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압도적으로 여자-학생의 글 그것도 여자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쓴 것이다. 책을 엮은 단체가 ‘한국청소년순결운동본부’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아직도 순결 교육은 많은 부분 여중과 여고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 책은 그것의 산물 혹은 일환이라고 생각 할 수 있다. 또한 “여자란 자고로 예쁘고 귀여운 사기 그릇 같아야 해. 무거우니 언제나 조심조심 다루어야 하고 깨끗하고 윤기 나는 밥이 사기 그릇의 기품을 더 높여주고 멋을 발해 주거든.”과 같은 말을 긍정하고, ‘나라와 정조를 위해 순국한 논개의 자손’, ‘나 하나쯤은 스스로의 힘으로 보호해야 할 현명하고 지혜로운 마음의 은장도’와 같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여자-학생 필자의 말하기를 통해(혹은 그것을 선택하여 수록하는 것을 통해), 명목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양성평등’과의 괴리를 드러낸다. 더불어 가정에서의 행복한 성과, 가정의 테두리가 아닌 곳에서의 어둡고 위험한 성을 대립시키는 기술이 반복되고 있지만, 그 두 가지의 질적인 차이는 비유적이고 비 논증적인 진술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있으며, 각종 성폭력의 피해담을 ‘저렇게 되지 않으려면, 몸조심하고 순결하게 살아야 한다’라는 식의 괴상한 논리로 전유하여, 성폭력이 발생하는 구조적인 원인을 무시한 채, 현실을 곡해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10대를 위한 성교육 수첩』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이 책에서는 ‘순결’을 직접적으로 주장하고 있지 않지만, 그것과 비슷한 ‘떳떳함’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이 떳떳함은 ‘사랑’, ‘생명’, ‘책임감’과 연계되는 개념으로서 최종적으로는 ‘결혼’이 그 최고의 형태로 여겨진다. 이 책은 성의 과학이라는 입장에서 주로 기술되고 있다. 성에 관한 무조건적인 금지가 아닌 쾌락에 대한 약간의 긍정과, 생리학적인 무해성의 입증을 통해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열어주지만, 성행위의 자녀 생산 기능에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하고, “나보다 자식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체질화된 성질”인 모성과 “이 나라가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힘은 바로 아버지의 힘”인 부성을 강조하면서, 청소년들이 당연히 부모가 될 것(혹은 되어야 함)이라는 가정을 함과 동시에, 성 역할의 구분을 구조화 하고 있다. 또한 사춘기의 성적 호기심과 욕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것은 남학생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서술하며 여학생은 욕망에 대하여 수동적이고 거부감을 가지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예컨대 자위행위는 나쁜 것이 아니며, “자위행위를 하고 난 후 생활에 활력이 된다면 그것은 생산적이라 할 수 있다.”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정작 뒤에 나오는 자위행위의 에티켓은 남자 학생을 위한 내용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성폭행 예방법’을 설명할 때에는 여성이 취할 수 있는 방법만을 제시하고 있으며, “나는 아기를 낳을 소중한 몸임을 잊지 말자!”와 같은 말을 통해 여자 학생에게 일률적으로 ‘어머니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두 권의 책이 공통적으로 취하고 있는 입장은 ‘가정’을 완전무결하고, 행복을 보장하는 체제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젠더적, 섹슈얼리티적 문제 제기가 주로 가정의 영역 안에서 제기되는 것임을 상기해 볼 때, 이는 매우 성급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가정은 성 정치의 종결점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점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꾸린 이후의 갈등과 문제점들에 대해서 함구하는 것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비난하고 있는 성에 관한 무책임한 환상들을 심어주는 포르노그라피 만큼이나 ‘환상적’인 것일 수 있다. 반면 『섹스북』은 이 두 권의 책과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이 책은 자신의 몸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여, 이성간의 섹스, 피임, 동성애, 성 상품화, 관계의 문제, 청소년의 성에 대한 통제, 젠더와 섹슈얼리티 억압에 대한 문제 제기, 사랑, 결혼 등, 성의 다양한 양상들을 유머가 섞인 친숙한 형식의 글들로 풀어낸다. 이 책은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으며, 나아가 구체적인 섹스의 상황을 포함한 성차별의 양상들을 지적하고, 그것에 대하여 논의함으로서 가정을 비롯한 사회의 곳곳에서 많은 갈등들을 생각 할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이 책들을 비교하는 것에 있어서 유럽 사회와 한국 사회를 곧바로 비교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 일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성교육에서 여자 학생들이 아주 당연하게(마음 속 한구석에서라도) 자신의 순결을 바라고, 성적 욕망에 대해 무감각한 존재로 그려지는 것은 여자 학생들의 성적인 주체성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하고, 욕망에 대한 실질적인 억압의 기제로 작동한다. 또한 모든 성적인 담론들이 ‘행복한 가족’으로 소급해 들어가는 것은 가족 안에 존재하는 갈등을 은폐하고, 후에 가족을 꾸리게 되었을 때 아내-어머니-여성으로서 요구받는 ‘행복을 위한 희생’을 정당화 한다. ㅣ우리 그냥 하게 해주세요~ 네? 뭔가 딱딱한 글이 되어버렸지만, 요는 이렇다. 한국에서 성교육의 관점이란 지금도 별로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구성애씨가 TV에서 외쳤던 떳떳함은 결국 저 체계 속으로의 편입을 위한 전략적 언술이었다. 『10대를 위한 성교육 수첩』의 표지에는 구성애씨의 사진이 박혀있다). 물론 요즘 청소년들이 저런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사회가 억압적인 규범으로 강요하는 한, 청소년들의 섹스는 항상 불안한 것일 수밖에 없다. 쉽게 욕망의 노예가 되는 사람들은 의외로,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아왔던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욕망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욕망을 컨트롤 하는 법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 사회가 청소년들의 진정 행복한 삶을 바란다면, 차라리 플라톤의 ‘향연’을 청소년 필독서로 권장하는 것이 지금보다 몇 배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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