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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 예술] 로리타, lol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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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vard Munch(1863-1944) [사춘기] 1894
1. '로리타, 로리타!' 로리타는 두 번 불러야 하는 이름이다. 그 이름은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로리타]는 중년의 남자 험버트가 로리타에게 바치는 애정과 집착에 대한 이야기이다. 험버트는 열두 살 소녀 로리타를 만나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로리타를 얻기 위해 험버트는 미망인이었던 그녀의 어머니와 결혼한 뒤 자동차 사고로 아내를 죽게 한다. 험버트는 어머니를 잃은 의붓딸 로리타를 데리고 사랑의 도피를 떠나지만, 로리타는 다른 남자를 만나고 험버트를 떠난다. 험버트는 자신의 사랑 로리타를 가로채간 연적을 죽이고 결국 법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이 책은 1955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판되었고 곧 판매금지 처분을 받게 되었지만, 소녀에 대한 중년남성의 병적인 집착이 묘사된 소설이 미친 파장은 상당했을 것이다. 소설 [로리타]의 주제는 소녀에 대한 지배와 소유욕이지만, 욕망에는 그녀로 인해 파멸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결합되어 있다. 남성을 파멸로 몰아가는 유혹적인 여성 – 팜므파탈의 이미지가 어린 소녀에게 투영되는 것이다. 이 복잡한 심리상태는, 음모가 무성하지 않으며 비좁은 질을 가진 여성기에 대한 선호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배욕구 이면에 깔려있는 약자에 대한 공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성인 남성이 비성인(어린) 여성에게 느끼는 특정한 욕망, 로리타 콤플렉스를 몇 장의 이미지를 통해 살펴보려 한다. 천사와 같고 악마와 같은 로리타의 양면성 말이다. 2. 일본에서는 어린이들에게 존대어를 쓴다. '세 살 전의 아이들은 모두 신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아를 존중하는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일본어에는 워낙 복잡한 존대어의 체계가 갖추어 있다는 점이나 유아사망율이 높았다는 점 등으로 이런 배경을 설명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어른들이 어린이의 모습에서 읽고자 했던 것은 신과 같은 절대적인 순수함일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유명한 작가 루이스 캐럴 역시 이와 같은 생각으로 소녀들을 대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간단한 약력을 소개하자면, 본명은 찰스 도지슨, 아버지는 목사였고, 그 자신도 신앙심이 깊었으며, 수학교수직을 유지하며(또는 유지하기 위해, 장학금을 받기위한 조건은 독신으로 지낸다는 것이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독신으로 지냈지만 고립된 생활을 했던 은둔자는 아니었다. 특히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의 학장 리델의 집안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는데, 리델 가의 세 자매 중 앨리스 리델과는 돈독한 사이었다고 전해진다. 아래의 사진은 소설 앨리스 시리즈의 모델이 되었던 소녀 앨리스 리델의 사진이다. 루이스 케럴이 직접 찍은 사진인데, 그는 소녀에게 거지와 같은 모습을 연출하게 했다. (루이스 캐럴은 사진에 조예가 있어서, 사진전시회에 출품하고 작품을 판매하기도 했다.) Lewis Carroll(1832-1898) [Alice Liddell as a Beggar-Child] 1858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루이스 캐럴은 유년기를 '순결의 시기'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별이 결정되기 이전의, 미성숙한 소녀들은 그에게 절대적인 예찬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그런 이유로 그는 어린 소녀들의 누드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그는 이 사진들이 '누드 사진'이 아니라 '옷을 걸치지 않고 찍은 사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누드모델 역이었던 소녀들과 그들의 어머니들의 동의를 구한 경우에만 옷을 걸치지 않은 소녀의 사진을 촬영했으며, 성적인 추문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 소녀와 소년의 누드는 대개 외설적인 것으로 해석되지 않았고, 캐럴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순결함의 상징', 에덴동산에 가까운 인간의 상징으로 보였다고 한다. 또한 서양미술사의 전통에서 '소년'의 누드(큐핏, 푸토, 그리고 어린 다윗 등)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캐럴의 소녀 누드 사진 촬영은 지탄받을만한 행동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소녀들의 사생활을 존중하기 위해, 누드 사진의 필름을 모두 없애 버렸고, 오직 4점의 사진만이 남아있을 뿐이라고 한다. ('로젠바흐 콜렉션 - 1978년에 모턴 N.코헨이 발행한 사진첩'에 이 사진이 남아있다는 국문기록을 읽었는데, 그 이상 조사하지는 못했다.) Lewis Carroll [Xie Kitchin] 1874
소녀들을 통해 절대적 순수를 추구했던, 이 순결한 남성의 심리는 어쩌면, 성인 여성(과 여성에 동반되는 성욕)에 대한 부정에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는 한 번도 연애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으며, 소녀들과 그녀들의 어머니들 외의 젊은 여성과 깊은 관계를 맺은 적도 없다. 굳이 주목할 만한 사례를 들자면, 거트루드 톰슨과의 관계를 언급할 수 있겠지만 이 관계는 소설가와 삽화가의 관계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거트루드 톰슨은 루이스 캐럴의 다른 여자친구에게 '캐럴은 당신을 나이 많은 소녀로 보고 있을 뿐'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전해진다. 루이스 캐럴은 어쩌면 성인 여성과의 관계맺음에서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포기한 채, 순결한 소녀들에 대해 몰입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가 소녀들을 성적인 대상으로 보았다는 누명을 씌울 마음은 없지만, 소녀에 대한 그의 애정에 탐미적인 요소가 있다는 점은 지적할만 하다. 아래의 작품 [알렉산드라 키친의 초상]에서 캐럴은 소녀를 비너스를 연상케 하는 이미지로 촬영했다. 모델이 가로 누운 포즈의 전통적인 의미와 어깨가 다 드러난 소녀의 옷차림을 염두해 둔다면, 이 사진이 소녀가 잠든 모습을 무심하게 포착한 것이라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Lewis Carroll [Xie Kitchin] 3. 또다른 작가의 예를 살펴보자. 발튀스는 1930-40년대 파리에서 활동했던 표현주의 구상화가이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혼란했던 시기, 대도시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의 물자부족으로 빈민들과 서민들의 향락은 극도로 절제되었지만, (군인을 포함한) 상류계층의 퇴폐적 유흥은 이전보다 성행하게 되었다.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예술가들이 죽음의 공포 앞에서 퇴폐적인 유혹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있었을까. 물론 이전에도 파리의 예술가로서 향락에 빠진 예는 무수하게 많았지만, 이 시기 예술가의 향락과 그 표현에는 좀 더 극적인 면이 있다. 세대의 차이점은 전쟁을 겪은 사람들 모두가 살아남은 것만으로 이미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전쟁 기간 중에 죽거나 미치거나 창작을 포기했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남은 것은 고통의 덩어리뿐이었다. Balthus (1908-2001) [Street] 발튀스의 위 작품은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로 인해 언뜻 보면 동화삽화와 같이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하지만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공포가 일어난다. 작품에 묘사된 인물들은 서로 단절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들을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은 냉소적이다. 위의 작품에서 욕망으로 인해 무언가 행동을 취하고 있는 인물들은 그러나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 관계 맺지 않는 피상적인 인간 군상이 모여있는 전체적인 공간은 기묘하게 뒤틀려있다. 화면 우측의 성인 여성들은 등을 돌리고 있는 반면, 좌측에서는 두 소녀가 정면을 향해 달려들고 있다. 그렇다면 이 소녀들에 주목해보자. Balthus [Golden Days] 1944-1946 '황금기'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 위의 작품을 보자. 흔히 인생의 황금기에 비유되는 유년시절, 하지만 화면 속에 구현된 유년시절은 어딘가 불길한 인상을 준다. 이제 막 가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소녀는 소파에 기대어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다. 젖가슴이 보일 듯, 허벅지가 드러날 듯, 소녀의 옷자락은 나른하게 흘러내려 있다. 그녀는 휴식하는 것처럼 소파에 누워있지만, 그녀의 표정은 교태를 연습하고 있으며 그녀의 여린 목덜미와 어깨부터 앙증맞은 발끝까지 온몸이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 보여지는 대상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 점을 자각함으로써 소녀의 황금기가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화면 우측에 묘사된 벽난로의 불길은 무엇을 말하는지, 불을 지피는 저 남성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납득해야 할지 모르겠다. 상반신을 드러낸 채로 열심히 불을 지피는 남자의 존재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의 일과 소녀의 일은 특별한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그와 소녀는 전혀 소통하지 않고 있는데 어째서 이 화면에 공존하고 있는가? 남자는 여주인공이 부유한 집안의 소녀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등장한 하인에 불과하다는 설명은 그럴듯하다. 하지만 이 가정의 실내장식에서 어떤 요소도 부유함을 강조하고 있지는 않다. 물론 평범한 가정의 실내에 있는 소녀를 묘사하는데 우연히 불을 피우는 남자가 배치되었다는 설명도 괜찮다. 도덕적인 사회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억지스러운 설명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Balthus [Portrait of Andre Derain] 1936
그렇다면 위 작품 [앙드레 드랭의 초상]에 대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도덕심에 위해를 가하지 않는 상황설명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앙드레 드랭(Andre Derain 1880-1954)은 당대 프랑스의 화가로, 마티스와 블라맹크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포비즘의 선구자이며 큐비즘에도 영향력을 미친 거장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창작을 위해 화가가 모델의 상반신 누드를 관찰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더 이상 과장된 비꼬기는 하지 않겠다.) 소녀는 눈을 감은 채 순종적인 모습으로 앉아있다. 그녀의 얇은 윗옷을 잡아 내린 것이 스스로 손인지 화가의 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중년의 화가가 성난 표정으로 정면을 노려보고 있는 까닭은 알 수 있을 것이다. 화가는 어떤, 은밀한 행위를 방해 받은 것 같다. 화가의 손-거구의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가늘고 섬세한 손은 무언가를 호소하는 듯 보이는데, 그렇다면 그의 말을 상상해보자. '살냄새가 향기로운 소녀와 사랑을 나누는 건 사내의 자연스러운 욕망이야. 젊음은 블루밍 - 피어나는 것이야. 내 사랑은 순수의 강요가 아니라 고유의 이중성을 발견하는 것이지.' [Golden Days]에서와 같이 거울을 보는 소녀 무료한 표정의 소녀들. 그녀들의 무심한 일상을 관찰하다. 발튀스의 작품에서 로리타 콤플렉스의 요소가 분명하게 보이는 작품을 발견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위에서 본 작품은 전반적으로 화가가 소녀들의 일상을 포착하는,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거리를 두고 제작된 것이다. 하지만 아래의 [기타 레슨]에 표현된 격정적인 상황은 그 이상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듯 보인다. 기타 레슨을 받고 있던 중 소녀는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는지 모른다. 기타는 방바닥에 나뒹굴어 있고, 소녀가 기타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선생님은 소녀의 몸을 연주하려는 듯, 기타현을 튕기는 왼손이 소녀의 터럭 한 올 없는 음부로 향하고 있다. 소녀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선생의 젖꼭지를 꼬집으려 하고 있다. 딱딱하게 발기한 유두처럼, 이 화면은 성적 긴장으로 팽팽하게 차 있다. Balthus [Guitar Lesson] 1934 4. 로리타 콤플렉스, 소녀에 대한 애정과 욕망은 소녀에 대한 탐미적인 태도와 무심한 소유욕이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무기력한 대상을 소유하는 것은 의지를 가지는 대상을 소유하는 것보다 훨씬 자극적인 일이다. 소유자는 더한 죄의식과 쾌락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유아살인범은 소녀 또는 소년을 학대하고 고문하고 성적으로 농락하면서 절대적인 권력의 성취를 느낀다. 너무나 무기력한 대상 앞에서 스스로를 절대적 공포의 대상으로 설정함으로 쾌감을 얻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로리타 콤플렉스라는 특이한 성적 욕구에는 긍정적인 부분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험버트는 로리타를 빼앗아간 연적을 살해했을지언정, 로리타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다. (소녀살해보다는 소녀애가 낫다-라는 억지스러운 주장을 계속하자면,) 로리타 콤플렉스는 사회화된 소녀애의 표현인 것이다. 교육적 관점에서도 사회화된 소녀애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루이스 캐럴과 교류했던 소녀들은 자신의 생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 이상의 안정감과 평화와 기쁨을 누렸다고 증언했다. 아, 로리타는 험버트를 통해 성장했다. 미숙한 열정은 성숙한 사랑과 다르다. 미숙한 젊음의 ‘무한한 가능성’은 발굴되지 않은 금광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또는 누군가의 힘을 통해 가능성이 개발되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미숙한 열정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 할지라도 방향이 없는 에너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성숙한 사랑이 가지는 에너지는 무언가를 이루어내기 마련이고 아무것도 이루지 않을지라도 그 자체로 충만하다. 그래서 미숙한 열정은 성숙한 사랑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로리타 콤플렉스가 사회적으로 구현되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5. 하지만 우리가 미숙한 사람의 의견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미숙한 목소리는 널리 울려 퍼지지 않으며, 누구든 성숙해진 뒤에는 자신의 미숙함을 (애써) 망각하기 때문에 말이다. 어쩌면, 미숙한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성숙한 자에게 젊음을 제공하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노련한 가르침과 계책에 따라, 아니면 젊은이 자신의 이익과 안위를 위해, 젊음은 소재로 제공된다. 사실 ‘어린’ ‘여성’이라는 이중의 권력적 하위에 있는 대상에 대한 애정과 소유욕은 진실한 것일수록 폭력적인 것이 되고, 이것이 현실에서 구체화되었을 때의 파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소유의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다음 편에서 마저 이야기하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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