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섹스와 그 적들
0
|
|||||||||||||||||||
'일부일처제에 대한 투쟁의 장소' 모텔은 교회의 십자가 네온싸인과 쌍두마차를 형성하며 도심의 밤하늘을 밝혀주고 있다. 그만큼 성적 실천력은 매우 왕성해 보인다. 그러나 이같은 현실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에서 프리섹스에 대한 논변은 완강한 수구보수적 담론의 억압에 짓눌려 변변히 펼쳐지지 못했다.
때론 물리적으로 짓밟히기조차 한다. 민주주의가 발화한 지 얼마 안된 10여년 전 마광수는 '즐거운사라'의 필화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마치 봄인줄 알고 튀어나온 개구리가 꽃샘추위에 얼어죽은 상황에 비견되리라. '성인식'이라는 음반을 음란물로 고발하는 시민단체의 모랄 테러리즘의 목소리는 드높기만 한데, 성해방-섹스의 자유를 외치는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기껏해야 변호인의 논변만이 횡행할 뿐이다. 그렇다고 보수주의의 정치적 대처점에 있는 한국의 좌파들이 유럽의 좌파들처럼 프리섹스의 원군으로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들은 프리섹스를 부르주아지들의 유희로 치부하거나, 상업주의에 놀아나는 철부지로 낙인 찍으며 비난하기도 한다. 페미니즘 진영도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그들은 프리섹스를 '남성의,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가당찮은 사기술로 치부하는 것 같다. 이렇듯 프리섹스는 좌우협공을 받는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다. 만인이 상상하고 또 실행하지만, 만인이 비난하는 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에서 한국사회 위선의 현실이 놓여있다. 프리섹스를 비판하는 각 논변들을 살펴보고 그 비판의 적실성 여부를 검토해보도록 하자. 1. 보수주의자들의 성윤리 한국 보수의 원류인 유교의 성도덕 가치는 많이 무뎌졌지만 그래도 대중들의 성윤리 의식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유교적 성도덕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관습과 '정조', '순결' 등의 가치일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 '남녀칠세부동석'을 문구 그대로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폐기 처분된 내용인 것 같지만, 그 관습에서 파생된 정서는 아직 완고하다. 청소년들의 이성교제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든지, 지하철이나 거리에서의 스킨십에 눈살을 찌푸리는 것은 그 의식의 단면이라 볼 수 있겠다. 21세기 명랑사회에 정조대가 왠말인가
'순결'과 '정조'라는 규범은 잘 알다시피 가부장적 질서에서 비롯된 여성억압적 규범이었다. 은장도를 쥐어주는 데서 볼 수 있듯이 기꺼이 목숨을 내걸 수 있는 절대적 가치였다. 자의에 의해서건, 강간을 당해서건간에 여성이 순결을 잃었을 경우에는 문중에서 도모지(얼굴에 물을 묻힌 한지를 씌워 숨막혀 죽이는 형벌)라는 끔찍한 린치를 가할 정도였다. 심지어 자녀목(姿女木)이라는 나무도 있었다. 정조라는 규범에서 벗어난 유부녀를 목매달아 죽이는 장소였던 것이다. 이렇듯 섬뜩하고 살벌한 규범이었건만 요즘 시대에도 '덕목(德目)'으로 칭송받는 가치로서 여전히 권장하는 현실이다. 물론 이전과 같이 여성 일방에게 전가시키는 윤리도 아니고, 또 형벌로서 강제하고 있지는 않지만 주류적 이데올로기로서 심리적으로 억압하는 건 여전하다. 시청앞에서 성조기를 흔들어대는 보수반동적 기독교 세력들 역시 청교도적 윤리관으로 봉건적 성윤리를 튼튼히 받쳐주고 있다. 이들 보수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성적 규범 논리의 대전제는 '하늘의 섭리', '신의 뜻'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막가파식 강변뿐이다. 여기에 '아무나하고 무대뽀로 섹스하면 그게 짐승이지 인간이냐'라는 인간주의적 세설을 그럴듯하게 덧붙인다. 여기에 '임질, 매독, 에이즈'라는 의학적 협박도 빼먹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순결'과 '정조'는 그럴싸한 이데올로기로 재포장되는 것이다. 그러나 거침없이 뱉어내는 주장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벽돌 몇장으로 날림 공사한 주택마냥 허술하기 그지없다. 프리섹스주의자라고 해서 매춘이 아닌 한 '아무하고나 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봐야한다. 노무현 대통령보다 오히려 더 까다롭게 코드를 맞추기도 한다. 특히 여자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짐승의 편에서 들어봐도 억울하기 그지 없다. 일부의 포유동물과 원앙, 기러기 등 조류는 철저히 일부일처를 지향한다. 사실 성적 스타일로 생각해본다면 1년 사철 쾌락을 위주로 섹스하는 것은 인간의 특성이지 생식을 위주로 하는 동물적 특징은 아니다. 그러므로 프리섹스는 오히려 인간적 본성이 한껏 드러난 행위에 다름아니다. 사실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의 '짐승론'을 듣자면 지 얼굴에 침뱉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봉건 질서의 정점에 있던 왕들이야말로 완벽한 프리섹스를 구가하였고, 사대부들 역시 '순결'과 '정조'의 개념이 없었으니 그렇게 본다면 조선시대 때 여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짐승같은 인간이라는 자가당착적 결론밖에 도출이 안되기 때문이다.(사실 봉건윤리의 비인간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맞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섹스를 짐승적 수준에서 고착시키려는 태도는 기독교자들을 비롯한 봉건적 성윤리론자들의 것이다. 그 윤리관의 시초라고 할만한 중세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연법 이론의 원리로서 성도덕을 규정했다. 그는 성 행위가 '인간의 본성과 인간 존재로서의 목적과 일치하는 경우에만 도덕적으로 적절하다'며 '성 활동의 자연적 목적이 생식'이고 '어린이의 양육은 결혼의 틀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결혼과 무관한 섹스는 자연법을 위반한 것이고 그래서 비도덕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하여 혼전 성교는 물론이고, 결혼 안에서도 생식과 무관한 섹스 역시 비도덕적이라고 낙인찍었다. 즉 피임하는 섹스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스터베이션과 오랄섹스는 말할 것도 없다. 이같은 기독교의 성윤리 규범에 딱 들어맞는 건 사실 짐승밖에 더 있겠는가? 성병 감염이라는 의학적 협박도 싱겁기는 마찬가지다. 이거야말로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대표적인 예가 아닐 수 없다. 에이즈를 제외하고는 사실 성병은 치명적인 질병은 아니다. 대부분 100% 완치되는 질병이다. 그나마 가장 심각한 에이즈의 감염자는 우리나라에서 5천명도 되지 않는다. 전체 인구의 0.0001%다. 십수년간의 누적 인원으로 생각해 본다면 로또 복권 당첨자의 수와 아마 맞먹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로또 복권에 당첨될까봐 두려워 하는 셈이 된다. 성병은 눈병이나 결핵같이 세균으로 감염되는 질병중 하나에 불과하다.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지만, 걸렸다고 해도 죄는 아니다. 수영즐기러 가서 눈병 걸려 왔다고 죄책감 가질 필요없이 섹스하다가 성병 걸리면 잽싸게 병원가서 치료받으면 되는 것이다. 성병에 대한 터부시되는 분위기 때문에 전전긍긍하다가 병을 키우는 현실이 오히려 성병보다 더 불결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게 다 키스신인겨?
전통적 도덕주의자들은 프리섹스가 우리네 정서와는 잘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개방 풍조를 질타하는데 여론의 배경도 든든해 보인다. 서양문화의 무분별한 유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도 틀렸다. 1940년대가 배경이었던 이탈리아 영화 <시네마 천국>을 보면 사제가 프렌치키스신을 검열하여 그 장면들은 온통 가위질 당했던 대목이 나온다. 또 비슷한 시기 유럽의 열혈 진보 논객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버트란트 러셀의 칼럼들을 읽어보면, '순결'과 '간통'이라는 개념을 통렬히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럽에서 프리섹스의 풍조가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68혁명 직후였다. 서양 역시 19세기까지 기독교적 전통 때문에 동양 못지않게 성적으로 보수성이 철저했던 사회였던 것이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서 생각해본다면, 사실 프리섹스는 서양문화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인권신장과 민주주의의 자식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아울러, 이른바 한국적 정서로 인한 지배적 여론이 보수적 성적 담론의 정치적 올바름을 입증하는 재료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도 지적해두어야겠다. 일본도 1947년까지 간통죄가 있었다. 그런데 그 법은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죄목이었다. 여성단체의 항의로 인해 이 법이 폐지되었지만, 실제의 여론은 이 법의 존치를 원했다. 이 부당한 법의 피해자인 여성들조차 70%가 넘게 이 법을 지지했다는 사실을 놓고 본다면 여론의 야누스적 성격에 아연해질 따름이다. 참고로 우리나라 역시 50년대 전까지만 해도 부녀자에게만 간통죄를 적용해왔건만 여성단체는 이 법을 폐지하는 대신 남자쪽도 같이 처벌하자는 쌍벌주의를 강력히 주장하여 오늘날의 간통죄가 50년이 지나도록 존속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편, 극단적인 보수적 성담론이 현실에서 설득력이 별로 없음을 깨달은 일부의 보수적 논자들은 약간의 개량적 태도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대표적 주자가 구성애인데 지난 회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었으므로 보수주의적 성담론의 비판적 검토는 여기서 마치기로 하자. 2. 페미니스트들의 비판 페미니즘은 현대의 이념답게 프리섹스에 대해 고루한 규범과 관념적 윤리관을 내세우며 비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성적 자유의 고유한 가치에 대해 일견 긍정적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다만 그들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여성의 성적 이용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다는 여자 화장실의 낙서를 한 번 보자.
여자들의 자유로운 성적 경험에 대한 남성들의 사악한 이중적 가치관에 대한 고발이 낱낱이 실려 있다. 자신은 자유분방해도 '내 여자만큼은 순결해 있기를' 바라는 남자들의 위선적 사고방식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프리섹스를 주장하는 자들에게까지도 이같은 맥락에서 일목요연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언니네'라는 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이처럼 페미니즘 진영에서 프리섹스를 비판하는 주된 요지는 남자의 성폭력적 성향을 합리화하고, 때로는 남자의 쾌락의 도구로 이용해 먹기 위한 사악한 꼬드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프리섹스에 대한 공연한 오해에 불과하다. 여자화장실의 낙서를 검토해보자. 자기 여자의 '비순결성'에 대한 남자들의 이중적 태도는 생각할 수록 괘씸하다 못해 야비해 보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위선의 근원은 프리섹스에서 오는 것인가? 아니면 순결 이데올로기의 찌꺼기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위선의 책임 소재를 금방 파악할 수 있다. 프리섹스가 만연한 사회(유럽, 일본 등)에서는, 자기 여자의 순결에 집착하는 문화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고 들었다. 만약 그런 이들이 있다면 아마 그건 도착증으로 손가락질을 받을 지도 모른다. 이같은 경험적 사실로부터 도출해본다면 우리 사회의 위선적 성의식의 단면은 순결 이데올로기에 알게 모르게 감염된 자들이 프리섹스를 이용해먹은 행태에 다름아니다. 상업주의가 때론 페미니즘을 이용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성에 대한 이중적 태도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프리섹스로 돌리는 것은 아군에 대포를 쏘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페미니즘의 문제점 중의 하나가 성담론이 나오면 거의 습관적으로 ‘성폭행’ 문제로 링크시키는 버릇이다. 마치 보수주의자들이 '청소년 보호'라는 무소불위의 명분으로 성자유주의자들을 공격하는 태도가 연상될 정도이다. 기실 프리섹스에 준칙이 있다면 아마도 제1의 원칙은 ‘no means no, yes means yes’(좋다믄 좋은 거구, 싫음 싫다는 거이야)일 것이다. 따라서 프리섹스가 제대로 작동되는 사회라면 성폭행 문제는 발생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험적으로 그런 경계의 눈빛을 보내고야 만다. 지나친 피해의식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페미니즘의 프리섹스 비판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실 대책이 없다는 데에 놓여 있다. 유교적 고루한 성적 규범을 혐오하지만 프리섹스주의자들에게도 ‘너거덜두 재수없는 건 마찬가지야’라는 투의 비난을 가한다. 그러면 페미니즘이 대안적으로 얘기하고자 하는걸 뭘까? 아무리 찾아봐두 내용은 없다. 다만 '전선을 그어야 한다'는 불타는 전의만을 발견할 뿐. 반항심만으로 똘똘 뭉친 화양리의 청소년들을 연상케한다. 물론 한국에서 성개방 풍조가 불면서 성범죄 비율이 높아지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마치 자본주의의 압축성장으로 졸부된 자들이 품위있게 돈을 쓸 줄 모르는 '어글리코리안'이 된 것처럼. 그러나 사회의 성숙도가 높아질 수록 '어글리'한 모습은 보기 힘들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프리섹스 풍조가 무르익게 된다면 성을 대하는 태도 역시 'no means no'의 수준에 근접하게 될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3. 프리섹스는 대세이다. 프리섹스가 만연한 사회가 만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이상향으로 묘사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지금의 현실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행복 추구권이 훨씬 보장받는다는 점에서 지금보다는 훨씬 진보된 사회인것만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 우선 생물학적으로 봐도 그럴 수밖에 없다. 첫째, 인간의 발육속도는 빨라졌고, 수명은 과거에 비해 경이로울 정도로 길어졌으며, 결혼의 시기는 점점 늦춰진다. '순결'과 '정조'라는 규범이 발명된 중세 시대 때의 인간의 평균 수명은 20세~30세 사이가 고작이었다. '혼전 순결’이라는 규범은 그 당시의 수명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평생을 딸딸이만 쳐야 한다는 결론이 나와버린다. 더구나 충분한 영양공급으로 발육속도는 빨라져서 성적으로 혈기가 왕성한 시기는 꽤 일찍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그 인내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더 길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 인간 수명의 연장은 기혼자들에게 한 배우자하고만 성적 관계를 갖는 시간이 매우 길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40년에서 60년 동안을 한 배우자하고만 살게 된다. 과거 같으면 부부로 맺어지는 기간은 대략 10-20년이었을텐데 3-4배 정도로 그 기간이 길어졌다는 것이다. 셋째, 노동시간은 갈수록 단축되어 여가시간은 그만큼 늘어났으며 각종 매체로부터 섹스어필의 홍수 속에 살고 있어 성적 욕망은 끊임없이 자극받는다. 넷째,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신장이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조건들로 인하여 혼전 순결은 물론이거니와 일부일처제마저 유지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마침 뉴스에서 흥미로운 토픽 하나를 발견했다. 미국의 국제문제 전문지 포린 폴리시 최신호는 창간 35주년을 맞아 앞으로 35년 이내에 사라질 것으로 보이는 사상•가치•제도를 열거했다. 그 중에 하나가 일부일처제도였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오늘날 일부일처제의 실용적인 이유는 재산의 대물림이나 여성의 보호에 있다. 하지만 사회적 투명성이 높아지면서 여러 명의 연인(multiple partners)을 갖고 있는 실상이 폭로되고 있다. 자유의 신장, 수명 연장과 함께 한 사람과의 연애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기술 발달로 인해 성•사랑•출산 간의 연계고리도 더욱 느슨해진다. 남녀는 각각 동시에 여러 명의 연인을 갖는 형태로 옮겨갈 것이다.'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