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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그녀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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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 1 남자를 사귀면 언제나 궁금한 게 있다. 나를 만나기 전에 만났던 여자가 어떤 여자였나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남자는 현재의 여자 친구에게 과거의 여자 얘기를 잘 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리 궁금하다 하더라도 그냥 평상시에 물어보면 남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잘 나질 않아’ 혹은 ‘뭐 그런 걸 다 물어보고 그러냐?’ 그래서 나는 언제나 섹스 이후에 그의 그녀에 관해 묻는다. 어떤 여자였냐고. 섹스를 마치고 나서 정신적으로는 만족스럽고 육체적으로는 릴렉스되어 있는 남자들은 평소에는 하지 않던 얘기를 곧잘 해 준다. 그리고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던 그녀들과의 섹스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하게 말한다. 그들의 옆에 나란히 누워서, 예전에 언젠가는 이렇게 누워있었을 여자들에 대해 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묘한 기분이다. 현재 진행형이 아닌 과거 완료형인 그녀들은 질투의 대상도 시기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다만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남자의 과거일 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녀들이 완료형이 아닌, 언제라도 나와 만날 수 있고 또 내가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여자들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렇게 언제나 그들의 말. 영화로 치자면 회상 씬에서나 등장하던 그녀들 중 하나를 실제로 만나게 된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다. 사귀던 남자친구의 집에 놀러 갔었는데 어른들께도 인사를 드려서 자주 들락이던 터라 나는 그의 방에 연필 한 자루까지 낱낱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잠시 볼일을 보러 나간 사이 나는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상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건 이미 짐작했겠지만, 판도라의 상자였다. 지금도 나는 그 상자만 생각하면 열지 말 것을, 아니 열었더라도 보지 말 것을, 다 좋다 치자 그래. 봤더라도 읽지는 말 것을 하고 생각한다. 내가 열 수 있었던 그 상자 속에는 내가 볼 수 있는 사진이, 그리고 읽을 수 있는 편지가 있었다. 2 사진 속의 그녀는 예쁘지도 그렇다고 못생기지도 않았다. 다만 무척 섹시하고 과감한 여자였다. 나는 어릴 때 빼고는 단 한 번도 입지 않았던 비키니 수영복 차림의 그녀. 월드컵 때인지 태극기로 가수 미나 못지않은 차림을 하고 레게머리를 하고 있던 그녀. 아무리 봐도 그녀와 나의 공통점은 없었다. 오히려 우린 정반대의 끝 지점에 있는 여자 같았다. 그리고 뒤 이어진 사진은 그가 그녀에게 키스를 하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타인의 앞에서 취할 수 있는 커플의 가장 야한 사진이 있었다. 단둘이 있을 때야 섹스도 할 수 있겠지만 사진을 찍어주는 누군가의 앞에서 딥 키스를 할 수 있었다는 건 그들이 공인된 커플. 혹은 그만큼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깊은 사이라는 의미였다. 나와는 단 한 번도 찍어본 적 없었던 사진. 비록 말로는 여러 번 들었지만, 그녀의 얼굴과 그녀의 필체를 실제로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나는 내가 과거의 여자에게 질투 따위는 하지 않는 꽤 쿨 한 여자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질문을 하고 그들이 나와의 섹스 후에 기분이 좋아져서 대답해 줄 때만 가능한 일이지 이렇게 예기치 못하게 그녀들을 마주할 때가 아님을 그제야 나는 알게 되었다. 거기서 멈췄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그녀가 쓴 편지까지 읽고야 말았다. 어차피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고 인간은 호기심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녀의 편지 속에는 그가 얼마나 자상한 남자인지 (자신에게 사랑을 가르쳐준 남자라고 표현했다) 또 그와의 섹스가 얼마나 근사한지에 대해, 오직 애인 사이에만 가능한 적나라한 단어들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의 입을 통해 이미 나는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그녀와의 섹스가 어땠는지도 들었었지만, 그것과 이것은 마치 애초부터 다른 얘기들처럼 느껴졌다. 3 상자를 닫은 후에도 나는 마음을 닫지 못했고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해서 상자 속의 내용물들은 나를 괴롭혔다. 너무나 보수적인 타입이라서 나의 옷차림이 늘 랄프로렌 걸즈 광고에나 나올법하게 입는 걸 좋아하는 그가 어째서 그런 화려하고 과감한 옷차림의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아니 너무 사랑해서 그것마저 눈에 보이지 않았던 걸까? 그 이후 나는 섹스를 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늘 그의 눈에서 그녀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있으면 그 상자와 연관 지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가 아닌 다른 남자들에게도 나는 그녀들의 얘기를 듣는 것을 즐겼었다. 그리고 그건 아무리 야한 얘기라 하더라도 또 은밀한 얘기라 하더라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었다. 지금 당장 그와 함께 누워있는 건 그녀들이 아닌 나였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짜의 나는 그녀들의 실체와 마주할 용기가 조금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 상자를 열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계속해서 내가 질투를 하지 않는, 그래서 재미 삼아 그들의 그녀들에 대해 궁금해한다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들에 관한 얘기를 들으면 나는 혼자 그녀들을 상상하곤 했다. 그녀들은 때론 귀여웠고 때론 아름다웠다.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섹시한 그녀들을 상상하지는 않았었다. 내가 가장 취약한 부분. 그리고 절대 내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었을까? 어째서 나는 그의 그녀들에 대해 그렇게 자신했던 것일까? 길을 가다가 마주쳐도 나는 나고 그녀들은 그녀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나는 결국에는 그 상자의 주인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루키의 소설에 나오는 등에 가난을 업은 아주머니처럼 그에게는 늘 사진 속의 그녀가 있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혹은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웠다고 울고불고하는 여자들의 얘기를 나는 가장 싫어했었다. 세상에 얼마나 할 짓이 없으면 그런 남자를 상대로 화를 내거나 혹은 가슴 아파하는가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더 나약한 인간이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랑도 아닌. 단지 기억에만 존재하는 과거의 여자에게도 이렇게 KO패를 당했으니 말이다. 4 그와 헤어지던 날. 사실은 그 상자에 대해 말을 하고 싶었었다. 하지만 내 마지막 자존심은 끝내 내가 솔직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도저히 너의 과거의 그녀 때문에 괴롭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전화한다든가 아니면 그의 앞이나 최소 내 앞에라도 나타났다면 모르겠지만 단지 상자 속에만 존재하는 그녀 때문에 헤어지자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 상자는 내게 열리기를 허락된 상자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지금도 가끔은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그와 그의 그녀가 생각이 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실제로 나와 살을 맞대고 서로의 몸을 가지기도 했던 그보다 오히려 상자 속에만 있던 그녀가 훨씬 더 실재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는 오직 그녀의 편지 속에 있던 남자로만 내게 와 닿는다. 그녀를 위해 겨울이면 카시트를 덥혀주고 도서관 뒷자리에서 몰래 도둑 키스를 했고 신림동 어딘가에 있는 여관에서 처음으로 그녀와 섹스를 했던 그. 나에게 해 주었던 모든 것들이 어쩌면 그녀에게 해 준 것들의 변주곡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내가 알고 있던 나 보다 나는 훨씬 더 질투가 강한 여자였던 걸까? 사람이 결코 숨길 수 없는 것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재채기고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마음이란다. 내게 만약 거기에 추가할 것이 없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의 그녀라고 말하고 싶다. 상자를 열었던 그 순간부터 나는 결코 그 사실을 숨길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끝내 들켜버릴 것이 두려워서 내가 먼저 헤어짐을 말했으니까. 이제는 남자를 만나도 그의 그녀들을 묻지 않는다. 그의 그녀들은 그들의 안에서 존재할 때만 내가 행복할 수 있으니까. 글쓴이ㅣ남로당 칼럼니스트 블루버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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