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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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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정글걸>
 
1
 
지난 토요일, 서울의 모 호텔 중식당에서 상견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요즘 들어 살이 더 빠진 덕에 애써 비싼 정장을 떨쳐입고 나섰으나 후줄근하기 이를 데 없는 내가 앉아 있었다. 버섯과 당근을 못 먹는 나에게 중국 음식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골라낼 수도 그렇다고 꿀꺽 삼킬 수도 없는 나는 왜 세상 일이 다 이 모양일까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날은 내 여동생, 즉 우리 집 막내의 상견례 날이었다.
 
월요일 아침. 식전 댓바람부터 엄마는 전화해서는 이번 주 토요일을 꼭 비워두라고 했다. 비워두지 않아도 서른둘의 토요일은 자동으로 비어 있노라 말하고 싶었지만 어째 또 턱도 아닌 선 자리일 것 같아서 나는 약속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것아. 네 여동생 상견례야. 그러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그날 꼭 멀쩡하게 입고 나와라.’
 
내가 여태 살면서 헛소리를 좀, 아니 꽤 많이 했다는 건 인정하지만 멀쩡하게 입고 나오란 건 또 뭔가. 내가 언제는 멀쩡하지 않은.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반 미친 년처럼 입고 다녔단 말인가?
 
토요일 오후에 잡힌 여동생의 상견례에 기꺼운 마음으로 참석해야겠지만 난 원래 그렇게 착한 인간 하고는 거리가 먼 인간이므로 엄마에게 말했다. 굳이 나까지 가야 하느냐고. 그 말에 엄마는 쪽수라도 많아야지 했다. 무슨 패싸움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가서 인해전술을 펼칠 것도 아니면서 웬 쪽수 타령인가 싶었더니 다 내막이 있었다. 이미 언니를 통해 있는 집 아들 놈을 사위로 삼아본 엄마는 처음부터 기선 제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신 것이었다.
 
상견례는 그럭저럭 잘 끝났다. 나에게 주문된 사항은 남자는 있되 일이 아주 좋아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능력 있는 30대 초반의 잘 나가는 전문직 여성이었다. 글을 쓴다는 말에 그쪽 어른들이 잠시 관심을 보이길래 섹스 칼럼을 쓴다고 확 까발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내 여동생이 가련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 자리에서 잡아 먹힐까봐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렇지(아무리 일이 좋아도 그렇지!) 왜 결혼을 안 하느냐는 물음에 엄마와 아빠는 나에게 한 주문 사항도 잊어버리고 잠시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했으나 이내 엄마는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얘는 남자보다 일이 좋다나요. 오호호호호호. 웃지나 말지. 내가 남자보다 일이 좋았던 적이 한 번이나 있었던가? 방송국에서 처음 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 아니면 신문사에 기자로 뽑혀 처음으로 취재를 나갔을 때? 너무 까마득해서 기억도 안 난다.
 
 
2
 
오빠도 언니도 그리고 이제는 여동생마저도 결혼한다. 모두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사람을 만나서 부모님께 큰 부담을 지우지 않고 결혼한 그들은 인생의 모범생들이다. 오빠는 대학에서 만난 언니와 캠퍼스 연인이었다가 졸업 후 바로 결혼을 하고 그들을 똑 닮은 답답하고도 재미없어 보이는 약국을 차렸다. 그리고 그 약국을 하면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잘 살고 있다. 약국은 크게 잘 되는 것도 그렇다고 안 되는 것도 아닌. 그저 우리 오빠네가 딱 쓸 만큼의 돈을 벌어주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새언니가 알뜰해서 얼마 전에는 조금 더 큰 평수의 아파트로 옮기기까지 했다. 정말이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스토리 같지 않은가? 오빠의 인생은 이렇게 재미가 없는 대신 매우 안전했다. 아이들도 어찌나 오빠와 언니를 가져다 박은 듯이 닮았는지 전혀 말썽 없이 고만고만하게 학교와 유치원을 잘 다니고 있다. 저렇게 크면 자기들 엄마, 아빠를 닮아서 공부를 너무 잘하지도 그렇다고 못 하지도 않아 딱 약대 정도 갈 성적의 고3이 되겠지 싶다.
 
언니로 말할 것 같으면 있는 집 자식에게 시집간, 그야말로 온 집안 식구들이 경사 났네! 분위기로 결혼시켰다. 물론 초창기에, 위에서 밝혔다시피 있는 집이 더 하다 부류의 패악을 살짝 부리긴 했지만 다 지나간 일이고. 아무튼, 언니도 결혼해서 매우 잘살고 있다. 결혼 전에 다니던 광고 회사를 관둔 걸 살짝 후회하고 있긴 하지만 뭐가 걱정이겠는가 형부가 워낙 잘 버는 데 말이다. 형부는 있는 집 자식답지 않게 귀때기 시퍼럴 때 심하게 논 타입이 아니라 그런지 아직은 바람을 피우지 않고(혹은 걸리지 않고) 있다.
 
어색하고 불편하죠. 그런 매체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묘한 매체가 우리한테 오는 거죠. 우리가 오늘 살펴봐야 할 게 매체가 딱 정해지면요. 매체가 변화해요. 피드백이 돼서요.
 
회사가 멀다는 핑계로 20대 때 독립한 걸. 나는 감히 내가 서른둘 평생을 살면서 잘한 일 베스트 3 정도로는 꼽고 싶다. 만약 그것마저 하지 않았다면 나는 정말이지 숨이 막혀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독립의 이유는 오로지 내 남자와 더는 여관이나 모텔을 전전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집이, 아니 방이 있다면 겨울에는 핫초코를 나눠 마시고 그보다 더 달달한 섹스를 할 수 있고 여름에는 같이 쏟아져 내리는 비를 보다가 우리도 함 쏟아져보아요, 하며 침대 위로 쓰러질 수도 있으리라.
 
마음이 정해지자 나는 단 한 순간도 집구석. 아니 집 구석에 붙어있고 싶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늘 살았던 우리 집. 암만 술이 떡이 되어도 저절로 발이 알아서 움직여 도착하곤 했던 우리 집이 어느 날부터 내 삶의 최대 안티 서식처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나는 생각했던 것만큼 내 남자와 내 방에서 많은 일을 함께하지 못했다. 독립 전에는 오직 그게 목적인가 같았는데 이상하게 독립을 해 버리니까 나를 남에게 너무 많이 노출하는 건 안 좋은 것 같아라는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연애를 하면서 내 집에 남자를 잘 들이지 않았었다.
 
가끔은 나도 그러고 싶다. 결혼은? 했을 때 응 작년에. 아기는? 지금 배 속에 있어. 어머, 너무 축하한다. 얘 결혼 때 부르지 어쩌고저쩌고 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남들이 다 겪는 삶의 사건들. 그리고 다 걸어가는 길들. 나도 알고 있다. 그걸 따라 겪고 걸으면 특별할 건 없지만 그래도 세상의 보편적인 행복은. 아니 적어도 안정은 보장된다는 것을 말이다. 뭐 이렇게 말하면 내가 대단한 뭔가라도 있어서 ‘난 평범하게 사느니 차라리 사약 반 쥐약 반 섞어 마시고 죽어버릴 테야’라고 우기는 여자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내가 평범해도 괜찮고 안 평범해도 괜찮다. 그러니까 그건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3
 
그냥 짝을 못 만난 것인지 아니면 뭔가 생각이 있어 일단 보류 상황인지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벌써 나는 서른둘이 되었고 이번 구정에는 쓰디쓴 떡국을 집어삼키며 빼도 박도 못할 나이를 절감할 것이다.
 
나는 액수가 쪽팔려 차마 밝힐 수 없는 적금 통장이 있고 (이번 달에도 원고료가 제때 안 들어오면… 저번 달에는 넣었던가? 기억이 안 난다) 증권회사에 다니던 전전 남 자친구가 만들어준 적립식 펀드 통장이 두 개가 있다. 몇 년째 끊어야지 하면서도 끊으면 글이 안 써질지도 몰라 하며 피우고 있는 애물스런 담배가 있고 비가 오면 홀로 한껏 분위기 잡고 야경을 내려다보며 마시리라 하며 (그러고 보니 내 집은 겨우 4층이다) 찬장에 짱박아둔 포도주 한 병이 있고 욕실에는 가끔 찾아오는 편두통 때문에 놔둔. 멋 부리느라 알맹이를 다 까서 유리병에 넣어둔 타이레놀 ER이 있다. 서른둘의 나는 대체로 그렇다.
 
가끔 TV에서 원룸 강도 어쩌고 하거나 홀로 귀가 중인 직장 여성의 날치기 및 퍽치기 사건을 접할 때면 확 결혼이나 해버려 싶지만 나는 안다. 결혼은 그냥 하려고 한대도 할 수도 없다는 걸 말이다. 끼리끼리 논다고, 내 친구들은 대부분 미혼이지만 결혼을 한 두 친구는 꽤 절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더는 만나지 않는다. 가끔 그녀들의 미니홈피에 올라오는 ‘우리 아기가 이가 났어요.' 혹은 ‘오늘은 혼자 앉았답니다.’ 같은 제목을 달고 있는 아기 사진 밑에 ‘진짜 귀엽다’ 라고 답글을 달아주긴 하지만 말이다.
 
싱글인 내 친구들은 거의 나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 외롭다는 말을 멋지게 주억거리기엔 이제 너무 뼛속까지 사무쳐서 차마 말 못하는. 그러다 누군가가 새로 연애질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빨리 새끼를 치라는 협박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네 성질에 얼마나 오랫동안 가겠니’ 따위의 생각이나 하는 그런 서른 둘. 가끔 모여서 섹스앤더시티를 흉내 내느라 브런치도 먹어보고 샴페인에 딸기를 놓고 파자마 파티를 해 보지만 다음날이면 서로의 푸석한 얼굴을 마주하며 이 짓도 이제 더 못하겠네 싶은.

여동생의 결혼으로 심란해진 건 아니다. 다만 내 심란함을 인정하게 된 것뿐이다. 숨기고 있었지만, 내내 심란했던 것. 더 원초적으로 말하자면 나이가 더 늙고. 그래서 정말 늙은 여자가 되었을 때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는 것. 나는 아무 대답도 찾을 수 없다. 애초부터 내 선택이어야 후회고 말고가 있지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걸 가지고 후회하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겠는가.
 
모두가 선택하는 안전한 길을 걸으면 세상이라는 정글은 꽤 살만한 정원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안전한 길을 때로는 몰라 못 걷는 게 아닌, 걷지 않겠다고 다짐해서 안 걷는 게 아닌 인간들도 존재하는 법이다. 서른둘의 싱글인 나는 아직도 세상이 정글이라고 느낀다. 이 속에서 살아남기. 그냥 별걸 해 보겠다는 게 아니라 단지 살아남고 싶다. 행복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살 소동 따위를 벌이지는 않을 딱 고만큼만 말이다.
 
 
4
 
여동생은 이제 안락하고 따뜻한 세계로 들어서려고 하고 있다. 그녀는 우리 오빠와 언니가 그런 것처럼 어느 날 임신 소식을 알릴 것이고 나에게 새 조카를. 그리고 엄마 아빠에게는 외손녀 혹은 외손자를 안겨 줄 것이다. 시간 되면 차곡차곡 집 평수를 늘려 갈 것이고 큰 맘 먹고 차도 한 번씩 바꾸겠지. 그리고 명절 때면 모두의 뿌듯한 시선을 받으며 딸로써 며느리로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나에게 그녀가 부럽지 않냐고 묻는다면 글쎄다. 나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언젠가 정글스토리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거기 출연했던 다소 어눌하고 어설펐던, 깎아 놓은 밤톨처럼 생긴 청년이 지금은 국민 가수 호칭을 받으며 활동하고 있다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거기에 정글이 나왔던가? 아니 어쩌면 정말 밀림에서 그 가수가 대성하는 스토리는 아니었던가?
 
구정을 며칠 앞둔. 여동생의 상견례에 다녀온 지 며칠 지난 나는 생각한다. 지금 내가 사는 얘기 자체가 정글 스토리는 아닐까 하고 말이다. 이 정글에서 올곧게 처음의 나를 지키며 온전하게 나로서 사는 것 말이다.


글쓴이ㅣ남로당 칼럼니스트 블루버닝
남로당
대략 2001년 무렵 딴지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잉태.출산된 남녀불꽃로동당
http://burur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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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2H13 2015-11-12 23:41:43
잘 읽었습니다. 30대라면 많이들 공감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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