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아이템 | ||||||||||||||||
|
한 많은 기생의 삶
0
|
|||||||||||||||||||
영화 <미인도>
일편단심을 노래한 조선조 기생의 시조인데, 조선시대 특성의 하나가 기생이다. 궁녀와 더불어 전문직 여성이었던 기생은 노비와 마찬가지로 한번 기적에 올려지면 천민이라는 신분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기생과 양반 사이에 태어난 경우라도 천자수모법에 따라 아들은 노비, 딸은 기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생이 양민으로 되는 경우도 있었으니, 속신이라 하여 양반의 소실이 되는 경우 재물로 그 대가를 치러줌으로써 천민의 신분으로부터 벗어 나는 것이었다. 한편, 기생이 병들어 제구실을 못하거나 늙어 퇴직할 때 그 딸이나 조카딸을 대신 들여놓고 나오는데, 이를 두고 대비정속이라 했다. 고전소설인 <충풍감별곡>에는 양반의 딸이 아버지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기녀가 되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기생은 조선사화에서 양민도 못되는 이른바 팔천의 하나였다. 기녀는 대개 열다섯 살부터 쉰 살까지 있는데 나이 어린 기생을 동기라 하고, 나이 든 기생을 노기라 하였다. 열 다섯 살에 기생 명부에 오르면 교방에서 음률을 익혔다. 일정한 교습이 끝나면 행수 기생의 엄한 제재를 받았으며, 방기를 위시하여 기생 안배를 호장이 하였으므로 아전과 기녀는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되었다. 다만 그들에게 위안이 있다면, 첫째 양반의 부녀자들과 같이 비단옷에 노리개를 찰 수 있었던 점이고, 둘째 직업적 특성에 따라 사대부들과의 자유연애가 가능했다는 점이며, 셋째 고관대작의 첩으로 들어가면 친정을 살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신분적 제약으로 인해 이별과 배신을 되풀이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속담에 기생이 잊기 어려운 다섯 가지가 있다. 맨 처음 남편을 잊기 어려운 것이 하나며, 뛰어나게 잘 생긴 미남자를 잊기 어려운 것이 둘이며, 정열적이고 씩씩한 것이 잊기 어려운 것의 셋이며, 돈이 많아서 잘쓰는 봉이 잊기 어려운 것이 넷이며, 추악해서 볼 수 없는 것이 잊기 어려운 것이 다섯이라 했다. 기생은 <석명>에 의하면 여악이라고 했으므로 조선이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여악을 위해 기생을 두어 내영에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진풍정 또는 진영이라고도 하여,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 행하였고, 여러 군에 명하여 기녀를 뽑아 올려 악원에 예속시켜 노래와 춤을 익히도록 했다. 의녀를 상고해 보면, 그 시초는 조선조 태종 때 제생원사 허도의 건의에 의해 설치했는데 궁중에서 비빈 내인들의 질병을 치료한 데서 비롯된다. 삼남 지방의 관비 중 나이 어리고 영리한 자를 뽑아올려 처음에는 제생운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혜민서에서 침구술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의녀는 반드시 침통을 차게 했다. 의녀는 내의원에 소속되어서 기생을 겸했기 때문에 약방기생이라 칭했으며, 침선비는 어느 때에 비롯되었는지 기록이 없으나, 선발한 다음 궁사에 이름을 올린 후 침선비라고 이름하였다. 침비는 상의사 소속이나 기생 역할도 하였다. 그 때문에 상방기생 또는 선상기라고도 불렀는데. 기녀 가운데는 약방 기생과 상방기생이 일류였다. 연산조에 들어와서는 의녀에게 연악과 가무를 가르쳐 일반 관기와 함께 연회에 참석시켰으며, 혼수 사치로 빚어지는 납체혼수품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관기 또는 권번에 속한 기녀로 조선시대를 풍미했던 기생들은 첨단 유행을 선도했고. 한편으로는 예인으로 독창적인 기생문학을 일구어 냈다. 한편, 조선의 기생들은 황진이와 더불어, 매창 그리고 논개를 추모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으암별제는 '향불을 피워 기녀 300명이 정성으로 제을 올리니 충의 어린 논개낭자 영혼이 내려오는 듯하구나'라고 표현될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일부에서 기생을 노류장화나 술자리 접대부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많은데 기생들은 호된 수련을 통해 배출된 엘리트였다. 해서 안동 기생 탁문화와 재담을 나눴던 주자학의 거두 주세붕도 기생이 <대학>을 외우고 익혔다고 칭송할 정도였다. 따라서 기생들은 고관대작들과 화답하며 시를 지었는가 하면 지조 없는 선비들을 은근히 비꼴 정도로 절개가 있었다. 이능화에 따르면 기녀들은 기생학교에서 3년 동안 <삼강행실도>부터 시작해 <여사서>를 배웠다고 한다. 우리나라 기업의 접대비 규모가 연간 5조원이며 접객업소에 종사하는 여성이 20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하지만 풍류와 멋, 질적 수준은 형편없는 지경이다. 기생처럼 덕목을 갖추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나친 음란성 술문화 보다는 시와 풍류를 즐겼던 조상들의 술문화를 되새겨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