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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사회의 친구 페미니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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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 [Orange is the new black] 지난 페미니즘 기사는 예상처럼 환상적인 리플 섹션으로 장관을 이루었다. 포르노만큼이나 페미니즘도 수컷의 발기를 자극하는 데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리플러들의 아우성을 듣자 하니, 성감대를 콕 찌르면, 교성을 내지르는 모습이 연상되어 내심 므흣한 기분에 가슴 설레인다. 뭇당원들의 이러한 성욕을 이미 간파했는지, 앵콜송을 부르라는 수뇌부의 준엄한 지령이 있었다. 하명상복 당기율의 엄중함을 잘 알고 있는지라, 당원발언대에 올려놓았던 페미 보충 글을 다소 수정해서 이번 기사를 때워볼란다. 여러 동지들의 반론에서 추출된 몇 가지 논점을 정리한 이 글로서 페미니즘에 무지한 필자의 페미니즘 리포트를 마감하려 한다. 이번에도 리플러들의 환상적인 딥-임펙트를 기대한다. ㅣ군가산점 폐지 이 문제는 언뜻 보면, 병역에 대한 보상과 기회균등이라는 가치가 충돌한 사안이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낙태냐, 출산이냐'와 같이 절충 불가능한 일방 양보를 전제로 하는 문제가 아니다. 군역에 대한 보상을 희생하라는 것이 아니라, 보상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이걸 혼동하면 안 된다. 군역에 대한 보상은 헌법재판소에서 권고한 것처럼, 취업알선, 의료보호 등 사회정책적, 재정적 지원 등을 통해야 하지,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는 방향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공무원 가산점 폐지의 핵심 이유인 것이다. 엄밀하게 얘기해서 '흘러간 내 청춘'에 대한 미흡한 보상이 억울하다고 한다면, 제대군인들의 이익단체인 예비역회나 입법부에게 가서 따질 일이다. 취업 문제에 있어서 군가산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가정한다하더라도, 좀 더 절충적인 방법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군가산점을 3%로 내리고 자격증 가산점을 그 비슷한 비율로 준다면, 군대 갔다 온 보상적 측면과 남자들의 복무기간에 여성들이 필요한 자격증을 취득하는 정도의 타협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안은 여기까지가 논리의 바운더리다. 논쟁을 하게 된다면 이 범주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군가산점 폐지와 관련해서 대부분 그 대상자도 아니었던 우리 남자들이 갖게 된 일종의 상실감은 이런 것이다. 황금같은 시기를 2년 넘게 썩으면서 뺑이치고 고생했는 데, 대접은커녕 여자들로부터 냉대를 받는다. 열 받아 죽겠는데 그나마 사회적 보상 중의 하나마저 여자들이 빼앗는다면? 울고 싶은 놈 뺨 한 대 맞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에 따라 분노의 화살을 여자들에게 퍼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완전히 핀트가 어긋난 것이다. 마치 삶이 팍팍하고 핍박받는 대중들의 분노가 타민족, 타종교, 타인종에게 겨냥하게 되는 경우와 비견된다. 여기서 제기되는 게 '평등 좋아하면 너거떨두 군대 갔다 와라'는 물귀신 작전이다. 여성들에게 병역의무와 비견할만한 사회 봉사하라는 것도 비슷한 논리다. 징병제 자체가 국가 경제의 손실인데, 그걸 여자에게 똑같이 강요하여 경제활동 인구를 일부러 축소시키는 건 자뻑일 수밖에 없다. '내가 손해보고 있으니, 너도 똑같이 손해봐야 한다' 라는 보복 심리가 생산적이지 않다는 건 잘 알 것이다. 청춘이 썩는 징병제가 문제라면 모병제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 정상적인 문제해결의 관점이다. 모병제의 가능성을 따지는 것은 이 자리에서 논의할 자리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 타당성은 여러 논자들로부터 제기되었다는 점만은 지적해두자. 남녀차별을 합리화하는 논리로 군대문제를 활용한다는 데 이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즉, '여자들만 차별받고 고생하냐? 남자는 군에서 청춘을 썩이며 좆뺑이 친다.' 이런 심리적 기제를 작동시킨다는 데 있다. 내가 비판하고자 하는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럼 입영 제도가 모병제로 전환되면, 자동적으로 남녀차별이 줄어들게 되는 것인가? 아니 적어도 모든 남자들이 성차별을 해소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단 말인가? ㅣ'정치, 경제적 지위 향상은 필연' 딴지토론토에서 '비오는날'이라는 한 논자가 제기하기를 한국 여성의 교육 향상과 사회로의 진출이 본격화된 것이 불과 십 수 년밖에 안되기 때문에 인재풀이 부족하다, 그래서 지금의 통계적 수치는 과거를 반영하는 것일 뿐, 지금 넓게 자리잡은 여성 인력을 감안할 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고위직 분포도는 올라갈 것이다 대략 이런 논리를 제기했다. 물론, 1%도 안 되는 지금보다야 더 떨어질 수도 없고 다소간 오르는 것은 거의 확실할 것이다. 그러나 1%에서 3%로 오르면 300% 증가라고 그 성과를 자랑할 만할까? 현재의 복지 시스템과 생활적 관습 등이 지속되는 한, 남녀간에 불균등한 모습은 여전히 두드러져 있을 것이다. 가령, 현재처럼 여자가 가사 일을 전담하고 보육을 가정에서 책임지는 상황이 여전하다면, 사회에 진출해 있는 여성들의 사회 속의 활약은 여전히 이중고 속에 부담이 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유로 기업이나 공직에서 여성들의 승진의 기회는 여전히 제한받게 될 것이다. 내 경험에 비춘 전형적인 시츄에이션 하나 소개하겠다. 우리 형님 내외는 공무원 부부다. 25년 전 직장에서 만났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면서도 맞벌이였다. 그러나 우리 형은 야간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면서 학력과 경력을 쌓고 본인의 월급 대부분을 학비에 썼다. 대신 우리 형수는 본인의 월급으로 생활비를 대며 아이를 길렀다. 어린이집에 맡긴 아이를 찾으러 가느라 퇴근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회식 자리 한번 맘놓고 낄 수도 없다. 승진 시험 볼 때 우리 형은 휴가 내고 거의 한달을 독서실에서 지냈다. 우리 형수는 그동안 아이를 돌보며 회사 생활을 하게 되었고 승진 시험은 애초부터 포기했다. 우리 형이 과장자리로 승진하고, 우리 형수가 공무원 연금을 수령할 나이가 되자 형수는 미련없이 직장에 사표를 냈다. 불과 5년 전 일이다. 여자의 상위직 3% 미만의 상황은 이런 시스템이 빚어낸 결과다. 자, 이런 사회적 현실에서 지금은 얼마나 떨어져 있길래 여자들의 지위가 미래에 자동적으로 개선된다고 말하는 것일까. 이 얘기를 하고 있는 논자가 우리 형의 위치에 있다면 과연 얼마나 다른 모습을 보여줬을지 궁금하다. 사회에 진출한 여성풀이 광범위하다고 해서 상위직에 여성들이 많이 올라갈 것이라는 무식한 착각은 아직 사회생활을 해보지 않은 학생들도 엄두를 못낼 것이다. 더구나 내가 예시한 것은 직장 내 보수적 임명권자들과 여성 차별적 직장 문화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황이다. 바꿔 말하면 이렇게 된다. 여성이 상위직에 올라가려면 그 좁은 꼭지점을 향해 성차별 문화가 만연한 불리한 여건에서 남자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것이 1차 관문이며, 가정 내에서 공평한 역할 분담이라는 관문을 2차로 뚫어야 하고, 보수적 임명권자의 편견을 3차로 뚫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의 대전제는 보육 문제가 사회 복지 차원에서 어느 정도 해결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남자끼리의 경쟁도 치열한 저 상위직의 꼭지점을 여자가 차지하는 것은, 그래서 남자보다 10배 가까이 힘든 일이 되는 것이고 여기에 남성대비 5% 미만의 여성 상위직 비율의 비밀이 있다. 승진시켜주고 싶어도 그럴 여자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이다. 여성 할당제 주장이 필요한 건 이 때문이다. '능력 위주'라는 말이 여성에게 왜 현실과 동떨어진 주술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는가? ㅣ'사멸하는 가부장제?' '비오는날'은 또 요즘 세상에 가부장제가 어디있냐고 힐난한다. 이것도 한 번 검증해보자. 家父長制. 아버지가 가족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봉건시대처럼 독재자 아버지의 한 마디에 온 가족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던 그런 권위가 요즘에 많이 쇠퇴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해서, 가부장제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그걸 착각한 것 같다. 가부장제는 아버지가 가족의 생계를 단독으로 책임지면서 가정 내 큰 권한을 행사한다. 여기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게 중요하다. 이런 현상 때문에 앞에서 말한 맞벌이 부부의 경우 결국엔 생계의 메인은 남편에게 있으므로, 아내는 보조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정리해고때도 맞벌이 부부의 경우 여자 먼저 해고된다. 물론 이것은 여자들이 자발적으로 행하는 경우도 많다. 왜냐하면 남자가 일하고 여자가 살림하는 경우는 자연스럽게 인식되지만, 그 반대일 경우 남자는 무능력하다고 지탄 받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남편이 그런 멸시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는 아내는 없다. 그런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감당할 수 없어 일하는 아내들은 자연스럽게 가정으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남자는 다시 가정을 책임진다는 의식이 더욱 강렬해지고, '서브 역할에 불과한' 여자들이 자신들을 치고 올라온다는 걸 용납할 수 없게 된다. 우리나라 40대 남자의 사망률이 가장 높은 게 바로 세계적으로 유례 없이 높은 가부장적 책임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럼 실업자 좋아서 결혼할 여자가 어디있냐? 여자가 남자 직장보고 결혼하지, 집안 일 잘해준다고 결혼하겠는가?'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어쩔텐가? 현재의 가부장적 무한 책임 상황을 그대로 영구적으로 온존시키겠단 말인가? 이 질문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대답해야 한다면, 우리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들은 가사 노동의 높은 가치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자가 주부가 되어 그 가치를 구현하는 것을 낮춰 볼 이유가 없어진다. 직장에서 여자가 능력을 인정받고 승진을 하면서 자아성취를 하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남자가 때론 여자보다 덜한 위치에 있거나 보수가 낮아도 무능력하게 낙인찍힐 필요도 없다. 물론 가장 최선은 둘 다 자신의 능력이 가장 잘 발휘되는 곳에서 일하고, 가사일도 동등하게 분담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모두가 그런 균형을 유지하기가 힘들다면, 때론 어느 한쪽으로 기울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풍토가 조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모든 책임을 남편이라는 가장이 짊어지고 있으니까, 실직하거나 사업이 망하면 남자가 모든 책임을 쓰고 노숙자가 되거나, 과로로 40대 젊은 나이에 쓰러지게 되니, 결국엔 '주먹이 울' 수밖에 없다. 물론 이같은 가부장적 풍토에 젖어 있는건 남자뿐이 아니고 여자들도 마찬가지여서, 결혼할 때 남자의 직장이 제 1기준이 되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건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식으로 여성과 남성이 서로 탓을 하며 미룰 일이 아니다. 직장 풍토, 가정 풍토가 바뀌는 데 첫 단추를 풀어야 할 것은 어차피 남성의 몫이다. 그러니 가부장적인 책임감에서 가정과 사회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불쌍한 아버지 신파극은 이제 그만두자. 100년 걸릴지 모르겠지만 쿨하고 유쾌하게 벗어던지기 시작하자. 힘들면 시각만이라도 교정해보자. 그런 점에서 드라마 '불량 주부'와 '연상녀-연하남 커플'의 등장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밖에 점차 간소화되는 경향은 있으나 명절 문화, 제사 문화, 시부모 봉양 등 가부장제의 부산물에 대해서는 지면상 생략한다. 다만 '주부우울증'의 원인 중의 하나로 지목될 정도로 그 위력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는 정도로만 지적하고 넘어가겠다. ㅣ‘재수 없는 페미년들’ 권리 주장이 강한 여성들, 특히 엘리트 여성들에 대한 반감이 하늘을 찌른다. 특히 이화여대로 대표되는 여성들의 표상은 이렇다. 부잣집에서 곱게 자라 세상 물정 제대로 모르고, 꾸미는 것 좋아하면서 똑똑한 척하고, 근데 막상 들어보면 텅 비어 있고. 허영심에 들떠있고, 차별에 대해 말하면서 학벌 따지는 위선자... 마치 싸가지 없는 부잣집 딸내미에 대한 반감을 거기에 다 투사시키는 듯하다. 2만 명이나 되는 학생들을 그렇게 단일화된 표상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는 것쯤은 아마 비판자들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근데 그런 감정적 판단이 자꾸 앞서는 이유는 뭘까? 아까 말한 남자들의 무의식 영역에 '여자들의 도전'을 용납할 수 없는 가부장적 사고가 또아리 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남녀가 똑같은 잘못을 해도 여자의 잘못이 좀 더 도드라지게 느껴진다. 또 결혼을 앞두고 사표 쓴 여직원들 보며, '이래서 여자는 안돼'라는 편견을 갖는다. 그 옆에 능력있고 성실한 기혼 여직원이 있어도 말이다.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부분만 입력시켜 편견을 쌓고 다시 여자에게 투사시키며 그걸 체험적 진리로 착각하고 사는 것이다. '비오는날' 동지는 '학벌주의에 젖어 있는 페미들'에 대한 반감을 토로했다. 페미니스트들의 위선, 여대생들의 세상물정을 모르는 주장, 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체험적 진리일 수도 있다. 나 역시 10여년 전 학생 운동 시절에, 서울대생에게 유난히 친근한 이대생들을 보면서 그녀들이 거의 생득적으로 엘리트 의식에 빠져 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대생만 그런가? 같이 실실 웃어가며 어울리는 서울대생들은 안 그런가? 아니 그 두 대학만 그런가? 대한민국의 수백만 수험생들은 이미 학벌주의의 의식화에 흠뻑 젖어들어 입시 지옥을 맹목적으로 버텨온 것이 아닌가? 한 가지 예만 더 들자. 조직의 진로를 결정하는 사안으로 전국의 수십 개 대학에서 회원들이 모인 적이 있었다. 그때 갑론을박으로 토론이 한참이었는데, 서울대 학생들이 낸 안이 있었고, 또 다른 안이 있었다. 그런데 서울대 학생들이 낸 안을 지지하는 발언을 한 학생이 단상에 내려와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는데, 지나가다 듣고 말았다. '서울대에서 하는 말인데 왜 반박하노? 무식한 쉑히덜...' 그 대학생은 지방 국립대 학생이었다. 요컨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른 게 아니다. 차별 폐지를 부르짖는 페미니스트인데 학벌주의에 젖어 있는 위선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관점에서 보면 그 페미니스트는 학벌물신주의에 빠져 있는 그 흔한 한국사람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성차별 문제 해결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즉 페미니즘에 덧붙여 숭고한 도덕적 의무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내가 '노동해방'이라는 거창한 구호에 '비정규직은 제외'라는 괄호를 치고 있는 민주노총-한국 노총에서 깨달은 것이며, '참교육'이라는 미명보다는 교사의 생존권 확보가 전교조의 존재기반이라는 점을 알게 되면서 부터이다. '국민의 건강권 확보'를 내세우며 의료분업에 불만을 터트리는 의사들의 집단 휴업을 보면서 진작 눈치 챘어야 했던 것이다. 작년에 '부정부패 추방'을 모토로 내건 공무원 노조 때부터는 아주 달관한 마음으로 그런 레토릭을 감상했다. 그래서 느닷 없이 '인권 싸움'을 하고 있는 경찰과 검찰의 모습에 더 이상 웃음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내세우고자 하는 명분의 진정성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사회적 명분을 자신들 권익의 젖줄로 삼아보겠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가상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주관적 열망이야 어쨌든 간에 어차피 계층이나 집단은, 좀 멀리 떨어져 있는 명분보다 손에 쥐어지는 이익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다. 내 권익 소중한 만큼 남의 권익도 인정해주자는 18세기 계몽주의 정신을 이어받아 개인주의의 시민적 양식에 동의한다면, 굳이 명분을 잣대로 권익을 검증할 필요는 없다. 부당한 학력 차별에 항의하는 고졸자에게 우리는 인류애를 바라지 않는다. 장애인 내부의 성차별 풍토가 있다고 해서, 장애인들의 권익 향상 노력이 평가 절하될 이유도 없다. 상호간의 권익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교차하는 지점이 있다면 그걸 깨끗이 인정하는 가운데서 그 명분은 현실로 가까이 올 것이다. 즉, '학력-학벌 차별 해소'를 위해 노력하는 자에게 페미니스트들은 의식화 대상 중의 하나이고, 페미니스트들에게 그들은 성차별 의식을 깨우치게 할 대상자 중의 하나일 뿐인 것이다. 이제는 먼지 뒤집어쓰고 있는 80년대 유물변증법 용어를 사용해서 미안한데, 끊임없이 '상호침투'하는 과정으로 생각하면 그만이다. 내가 페미니스트들에게 바라는 것도 이 이상의 성격이 아니다. 그가 전여옥이가 되든 말든, 또 악독한 상급자가 되든지 말든지 나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게 문제되면 성별에 상관없이 그때 그 사안으로 비판하면 될 일이다. 다만 여자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차별되는 현실이 개선된다면 그 자체로 의미있는 사회의 진보라고 생각한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의 인격과 그 주장을 분리시키지 않고 싸잡아 버릴 때, 우리는 목욕물과 함께 아기를 버리는 우를 범한다. ㅣ마치며 어떻게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열혈 페미니스트로 포지셔닝 되어버렸는데, 지금 나의 심정은 다음과 같은 진중권의 토로가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것은 억압받는 여성들에게 연대를 표한다기보다는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이 구조에 짜증을 내는 행위에 더 가깝다. 그저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좀더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욕망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이 표방하는 대부분의 가치에는 동감을 표하고 또 열렬히 지지하나, 솔직히 말하면 맘속 깊은 곳에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진중권, [시칠리아의 암소]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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