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연애의 온도>
중 고등학교 시절 내내, 그리고도 얼마간, 근 10년의 세월 동안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늘 생각나던 사람. 그만큼 절절히 짝사랑 했던 사람. 급기야 꼬시는 데 성공했으나 얼마 못 가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 내가 사랑이라 이름 붙인 신기루의 모델이 돼 준 사람.
그 사람을, 동네 마트에 기저귀 사러 갔다가 딱 마주쳤다.
만삭인 듯 힘겹게 허리를 짚은 그의 아내가 "고추장은 이걸로 할까?" 묻던 참이었다. 카트에는 자길 꼭 닮은 아들을 태우고. '제발 아무거나 좀 사서 가자'는 나른한 표정으로 하품을 하던 참이었다.
이 의외의 만남에 내가 너무 흥분했었나 보다. 옆에 있던 남편의 팔을 잡아 당기며, “어머! 저기 봐! 저기!!”하며 난리를 쳤다.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그들을 향해 “저기 저 파란 잠바 입은 사람 봤어? 저 사람이 내 첫사랑이야.”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구리구리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는 남편 얼굴을 보니 내가 왜 그랬나 싶은 생각이 밀려들었다.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신랑은 “연희는 왜 저런 애들만 좋아해?”라며 질투심 어린 겐세이를 보내고, 나는 계속 두리번거리며, 그 사람이 나를 봤을까 못 봤을까 생각했다.
좋은 감정이 남아서 그런 건 아니다. 미련은 더더욱 아니다. 너무나 오랜만에, 너무나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반가워서 크게 인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렇게 못하는 관계를 만났다는 사실이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카트를 미는 다정한 남편과 행복하게 웃고 있던 내 모습을 그가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뭐 더 살 거 없나 하며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내가 민낯에 추리닝 바람이라는 사실이 떠올라 잽싸게 카운터로 향했다.
옛 애인을 우연히 마주칠 때 마다 생각한다. 헤어진 옛 남자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말은 사실 다 뻥이다. 세월이 흐를 수록 '그저 그런 남자'가 되었거나, 나를 너무 사랑했던 나머지 솔로로 외롭게 늙어가고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땅을 치며 후회할 필요가 없게. 그리고 나는 아주 아주 예쁘고 멋진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다. 그때, 그가 나를 꽉 잡지 못한 걸 후회하며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많이, 정말 많이 부러워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