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적 사랑은 가능한가? - 영화 '그녀' par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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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녀> “포르노의 매력은 성적이라기보다도 형이상학적이다.” - 장 보드리야르 영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형언할 수 없었던 어떤 욕구가 내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존재함, 그 자체에 고민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존재로서 존재함에 대한 갈망과 때로는 존재의 허무감 사이에서 발버둥치는 삶의 양태가 어쩌면 삶을 살아가는 과정인 것을 느끼게 했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우리의 진정한 존재양태는 무엇인가? 수많은 물음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근본적인 근원을 알 수 없지만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1. 실재와 실체, 그리고 실제 레비나스는 “‘이것이 존재한다.'라는 표현 속에서 존재는 속사가 되지만 존재는 주어의 행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주어는 ‘존재한다.’라는 동사적 주체성을 능동적으로 갖지 못한다. 다시 말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내 의지가 반영되어 있지 않다. 내가 걷는다는 것과 무엇을 먹는다는 것, 그리고 내가 목표를 정해 무엇을 하겠다는 건 능동적인 주체성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내 의지를 초월해 있다. 이와 같이 존재한다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것이며 ‘내가 존재한다.’라는 존재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는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과 존재함 자체를 감당하지 못해 존재함을 포기하고자 하는 욕망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두 욕망 사이의 끝없는 갈등은 우리들 삶의 여정 가운데 있다. 인간은 존재 자체의 욕망 뿐 아니라 존재함을 전제로 향유하고자 하는 욕망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생존에 관한 욕구 뿐 아니라 삶을 영위하는 과정 가운데서도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욕구는 인간 존재를 능동적으로 만든다. 나를 나 자신이게 하는 그 욕구를 인간 존재는 충족하려 한다. 인간 존재는 존재의 실재, 실체 그리고 실제의 세 가지 전제조건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인간 존재로서 실체 없는 실재가 없고, 실재 없는 실체가 없으며, 실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인간 존재는 이 세상에서 떠난 존재다. 여기서 잠시 실재와 실체 그리고 실제에 대한 개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실재 = 무엇이 있는 것인가? 실체 = 어떻게 있는 것인가? 실제 = 현 사실적으로 언제 어디에 어떻게 있는가? 인간 존재와 달리 영화에서 나오는 '그녀'는 실체가 없는 실재적 존재다. 현 사실적으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존재한다.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실재'하는 것은 반드시 '실제'로 '실체'하는가? 만약 실재하는 것이 실제로는 있지만 실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 존재와 같이 구체적 존재는 아니다. 그렇다면 영화 속 ‘그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운영체제로 존재하는 '그녀'와 관계를 맺는다. 주인공이 ‘그녀’와 맺는 관계는 마치 인간 존재와 맺는 관계와 같이 느껴진다. 프로그램에 불과했다고 생각했던 실체 없는 인격체는 주인공과의 관계 속에서 주인공에 맞추어 변증법적으로 성장한다. 이 과정 속에서 '그녀'는 주인공의 정신적 사랑을 완벽히 만족시켜주는 인격체가 되어간다. 주인공은 실체가 없는 실재적 존재를 향해 사랑에 빠져 프로그램의 인격체를 실체적 존재로 착각하기에 이른다. 이 둘 사이에서 피어난 플라토닉 사랑은 심지어 실체를 확인시켜주는 성적인 욕구까지 만족시킨다.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인간 존재가 욕망하는 관념의 욕구를 완벽히 만족시키며 정신의 영역이 육체적 영역을 넘어서면서 사실 완벽한 삶이 구현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운영체제와 사람의 갈등 구조는 심화되고 주인공은 결국 이 모든 것이 허상인 것을 깨닫는다.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완벽한 존재의 현현이 과연 가능할까? 이 세계에 존재하는 존재란 항상 ‘존재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함을 드러낸다. 존재는 존재자를 떠받치고 있다. 다시 말해, 존재는 온전히 다 들어날 수 없으며 ‘존재자’ 없이 그 존재를 드러낼 수 없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하는 성서의 신학적 테제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한 인간의 모습 속에서 신의 존재가 구현되었다는 고백으로써 신이 자신을 실체적 존재를 통해 자신의 존재함을 드러냈다고 말하는 것이다. 존재는 끊임없이 자기를 감추고 부분적으로 존재자를 통해 드러낸다. 그러므로 삶의 과정은 끊임없이 존재를 달리 드러내는 작업이 된다. 인간존재가 어떤 존재에 대해서 나아갈 때 그 인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자신에게 주어진 ‘존재자’(신체)를 통해 항상 달리 드러나고 언제나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결코 완전히 알 수 없다. 이 포섭할 수 없는 존재양태를 레비나스는 '애무'라는 철학적 개념을 통해 “내가 만졌던 것이 마치 여기 있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버린 것을 계속해서 찾는 움직임이다.”이라고 설명했다. 레비나스는 이를 ‘타자성’이라 말한다. 존재가 자기를 개시하고 은폐하는 운동은 존재를 포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생각을 미끄러지게 만든다. 레비나스는 이 존재 양태가 바로 인간 존재라는 것을 명시해준다. 실체를 지닌 실재적 존재는 그 자체로 완벽한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 속에서 존재를 끊임없이 새롭게 드러낼 뿐이다. 이 과정 속에서 존재가 온전히 드러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은 분명한 한계가 있기 때문에 존재가 완벽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어떠한 장담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실체를 지닌 실재적 존재는 그 존재를 완벽하게 드러내는데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인간존재는 자신의 욕망을 완벽히 충족 받을 수도 없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가상현실을 만들어 이러한 자신의 욕망을 충족 받으려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한다. 가상현실은 인간이 구현할 수 없을 것 같던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다. 가상세계는 기술이 존재하는 한 한계가 없으며 시공간을 초월해 있다. 가상현실 속에서 인간존재는 자신의 존재양태를 새롭게 치장한다. 가상현실에 자신의 존재를 투영한 인간존재는 스스로 실체가 없는 실재적 존재로 자신을 탈바꿈한다. 그리하여 실체를 지닌 자신의 존재를 초월하려 한다. 포르노적 사랑은 가능한가? -영화 <그녀> part 2 ▶ http://goo.gl/i522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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