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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부추기는 사회, 영화 <바람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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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람난 가족>
 
영화 <바람난 가족>에 대한 평가를 보면 사회의 기존 질서와 가치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 차마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들추어내서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람난 가족>에 나오는 인물들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전에는 오르가즘을 잘 느꼈던 호정이 요즘에는 남편과 섹스를 하면서 전혀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고 호정의 성욕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남편 영작과의 무미건조한 섹스가 끝나고 나면 반드시 자위행위를 해서 성욕을 해결한다.
 
그런데 영작은 자위행위를 하는 호정을 외면한 채 침대 밑에서 이제는 몸도 마음도 다 변했다고 투덜댄다. 호정이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 호정이 변했다는 것이다. 왜냐면 예전에는 호정이 자신과의 섹스에서 오르가즘을 잘 느꼈는데 언제부터인가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신혼이 지나서 정신적인 흥분이 사라지게 되면 성적 자극을 받아도 사람의 몸이 쉽게 흥분하지 않는다. 그것을 모르면 두 사람의 문제를 극복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서로를 원망하면서 체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그냥 혼자 알아서 성욕을 해결하라고 하면서도 눈앞에서 자위행위를 하는 것에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 영작은 외도를 한다. 대다수의 남자들처럼 영작도 외도를 통해 자신의 성 기능에 문제가 없다고 위안을 삼고 삶의 활력을 찾고 있는지 모른다. 영작은 새로운 여자를 만나면 설레고 들뜬 흥분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단순히 성적 마찰로 느끼는 자극보다 훨씬 더 짜릿하고 황홀할 수 있다. 많은 남자들이 배설보다 설레고 들뜨는 정신적인 흥분을 더 즐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섹스를 잘해서 새로운 여자 김연을 만족시키는 것도 아니다.
 
김연은 남자에게 의존적인 여자가 아니다. 가만히 누워서 남자가 알아서 자신을 만족시켜주길 기다리는 소극적인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남자의 몸을 이용하여 자위행위를 하면서 능동적으로 성욕을 해결한다. 단순히 유부남의 배설 도구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작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는 그런 여자도 아니다. 섹스는 함께 노력해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도 김연은 남자와 섹스를 하면서 전희를 요구하지 않는다. 사실 김연은 남자와 섹스는 열심히 해도 성 지식이 없다 보니 어떻게 해야만 함께 섹스를 즐길 수 있는지 모른다. 결국 김연 역시 섹스가 끝난 후 자기 혼자 자위행위를 통해서 성적 만족을 얻는다. 굳이 남자가 없어도 될 일을 유부남까지 끌어들여 놓고 혼자 자위행위로 섹스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만약 김연이 성적으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면 영작에게 전희를 요구했을 것이다. 그리고 전희만으로도 오르가즘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런데 영작이 삽입을 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사정하고 나면 그 다음에 남자의 엉덩이에 자신의 클리토리스를 비벼서 오르가즘에 도달한다. 어쩌면 김연은 남자와의 섹스로 성적 만족을 얻는 방법을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연이 영작의 아내 호정보다 더 사랑을 받고 있다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단지 호정은 남편의 외면 속에서 혼자 자위행위를 하고 김연은 영작의 몸에 자신을 비벼서 자위행위를 하는 것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바로 영작이 두 여자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두 여자가 자위행위로 자신들의 성욕을 해결하는 것이 모두 영작의 무능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섹스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섹스의 주체가 영작 혼자는 아니다. 호정이든 김연이든 섹스의 또 다른 주체라는 말이다. 여자도 섹스의 주체가 되어서 전희를 요구하고 함께 성적 만족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난 결혼하고 나서 오히려 더 섹스를 하지 않는 것 같아. 무슨 중성 취급을 받잖아."
 
호정의 이 말 속에 영작이 자신을 여자로 보았다면 섹스를 자주 했을 거라는 암시가 숨어 있다. 남자는 여자만 보면 짐승처럼 덤벼들어야 하는데 자신을 여자로 보지 않기 때문에 섹스를 자주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섹스는 남자가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호정은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섹스를 자주한다고 오르가즘을 느끼고 성적 만족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호정이 전혀 성 경험이 없는 고등학생인 열 일곱 살 지운과 섹스를 한다. 이때 호정이 지운에게 어떤 섹스를 가르쳐주었을까? 기껏 남자가 발기되면 질 입구를 찾아서 삽입을 하는 것밖에는 가르치지 못했을 것이다. 당장은 남자들처럼 설레고 들뜬 기분에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조금만 지나면 영작과의 섹스를 할 때처럼 또다시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호정은 또 다른 영작을 만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자의 몸과 마음을 애무하여 잠든 감각을 깨워서 흥분이 고조되게 만들 수 있는 남자로 만들지 못했다는 말이다.

영작은 직업이 변호사일 정도로 사회적으로 엘리트에 속하는 남자이다. 그런 남자까지도 섹스를 할 때 발기되면 삽입해서 사정하는 것으로 섹스를 끝내고 있다. 단순히 말초적인 자극에 의존해서 얻게 되는 성적 쾌감은 분명히 사정을 했는데도 뭔가 허전하고 항상 좀더 색다른 섹스를 원하게 만든다. 그리고 왜 자신이 그렇게 공허하고 여자를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우리 사회가 섹스에 대해 무지하다.
 
결국 이 영화가 사회의 기존 질서와 가치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남자만 외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외도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몹시 불편하기 때문이다. 남자의 외도가 늘수록 그 섹스 상대인 여자의 외도가 늘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애써 여자의 외도를 외면하려는 것은 보지 않으면 현실이 감추어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차라리 모르면 마음이 편할 텐데 왜 그것을 알리려고 하는가 하는 진실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섹스를 배워서 부부가 서로에 대해 싫증을 느끼지 않고 나날이 새롭게 사랑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런 섹스 방법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문제의식을 가지고 지적할 수는 있어도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처음부터 모르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간통죄' 폐지가 사회를 문란하게 만들 것이라고 염려하면서도 애초부터 '간통'이 일어나지 않도록 부부가 성적으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성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것을 외면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더
부부관계연구소 이사장 / 펜트하우스 고문
탄트라 명상연구회 <仙한 사람> 회장
저서 <이혼했으면 성공하라>, <우리 색다르게 해볼까>, <그래도 나는 사랑을 믿는다>
http://blog.naver.com/arder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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