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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자위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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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타우로스와 에로스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그리스 조각. 세상에 오직 이 단말마만이 있어 우주 끝까지 닿을 듯하고, 모든 근육은 이제 막 마지막 숨을 몰아쉰 것처럼 부풀려 터질 것만 같다. 예언가 라오콘처럼 이 켄타우르스는 고통의 최정점에서 순간 얼어붙어있다. 루브르의 가이드는 말한다. 원래는 이 켄타우르스의 등에다 '욕정의 화살'을 박아 넣는 에로스가 있었다고. 아하. 그제서야 이 고통의 드라마가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켄타우르스는 뒤로 두 손이 묶여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격정과 술에 취해있는 동물적 본능의 상징, 켄타우르스의 두 손을 묶는다는 것은 사랑을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박탈한 것이나 다름없다. 무엇보다도 마스터베이션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큐피드가 켄타우르스에게 한 짓의 잔혹성이 뼈져리게 느껴지리라.

디오게네스는 공공장소에서 자위를 하곤 했다고 한다. 그는 인간의 직립이 양손을 정확히 성기의 위치에 닿을 수 있게 함으로써 언제나 성적 감정을 촉발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최초의 사람이었다. 인간이기에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할지언정 자신의 욕정을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철학자적 자기 충족성'을 지향했던 것이다.

 
 
자위를 묘사한 이집트 벽화

모든 사람이 철학자일 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욕정을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만할 것 같다. 무엇엔가 의존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닐 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아는 것은 조금은 필요한 일일 것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다른 가능성을 낳을 수 있기에 말이다.

얼마전 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도대체 쌀 줄을 모르던 남자랑 사귀던 여자가 결혼을 했다. 그런데 그렇게도 지독했던 지루가 순식간에 조루로 바뀌어 버린 모양이었다. 막 달아오를만하면 나가 떨어지는 남편을 보다 못해 이 여자, 옆엣 남자를 못 본 체, 자위를 시작했다 한다. 그 와중에, 물끄러미 쳐다보던 남편이 한 마디 단말마를 토하며 다시 올라 타더란다. 

“비켜!”

우리는 아내의 자위행위에 대한 남자의 태도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상대방을 만족시키겠다는 그 전투적인 자세는 치하할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뉘앙스’로나마 그가 아내의 자위행위를 자신에 대한 노골적인 항의로 받아들였을 공산이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아내의 완전한 만족을 원하는 것일까? 아내의 만족은 자기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을까?
 

1887년 밀턴(J.L Milton)은 소책자 <정액루(Sphermatorrhea)>에서 발기 방지를 위해 못 달린 링과 전기 벨을 자녀들의 페니스에 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전기 벨은 잠자는 아들이 발기하면 부모의 침실에서 울리게 되어 있었다. 밀턴의 생각과 술자리 농담 속의 남자의 갑작스러운 반응은 서로 비슷한 맥락에 놓여져 있다. 자기충족으로서, 스스로에 대한 배려로서 하는 자위 행위는 생산적이지 못하다고 여기는 것.

'자기 자신이 되는 것 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고 한 것은 테레즈 데케루였을 것이다.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해서, 그녀가 택한, 남편과 전통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되찾는 시도가 벽에 부딪히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자신의 만족을 위한 노력을 멈추고 타인에게 책임을 떠넘겨서는 안 된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상대방과의 섹스에서도 우리의 살갗을 통해 전해지는 우리 자신의 감각만을 느낄 뿐이다. 그 감각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게 된 사람이야말로 상대방의 느낌에도 세심해질 수 있고, 따라서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줄 ‘가능성’도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자위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자위는 가르쳐져야 하고 가능한 열정적으로 탐구되어야만 한다. 물론, 자위만이 주장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공리주의적인 차원에서, 누군가의 말을 빌어 ‘누구에게도 해롭지 않으면서 어떤 사람들에게 이로운 것이라면’ 권장될 수 있다는 원칙을 확인하는 정도로도 긍정성을 역설할 수 있는 것이다. 공리적인 관점에서는 자위야말로 가장 앞줄에 놓일 ‘善’이다.

두서없는 글을 맺어야 한다. 2001년, 미국의 <굿 바이브레이션 협회>가 내건 구호가 마무리에 알맞을 것 같다.


“전지구적으로 사고하고, 개인적으로 자위하라!”
남로당
대략 2001년 무렵 딴지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잉태.출산된 남녀불꽃로동당
http://burur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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